진천군 남지(南智)의 묘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은 예정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것은 강하게 , 어떤 것은 약하게 예정되어 있어서 그 흐름대로 갈 뿐이다. 예를 들어 내일이 되어도 해는 뜰 것이다. 이것은 강하게 정해진 것이고 어떤 사람과의 약속이 있다면 그것은 약하게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책을 한 권 읽는 것에 대해 마음을 먹는 것 역시 약하게 예정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작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물이든 어떤 결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천군에 있는 남지의 묘소에는 신도비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남지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려면 남 씨 일가의 먼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의령 남 씨의 시작은 신라시대에 시작되었다. 당나라 봉양부 여남에서 표류하다가 신라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그 땅이 좋아서 살기를 원하자 경덕왕은 여남에서 왔다고 하여 남 씨라는 성을 하사한다. 대를 이어 살아오던 남 씨 일가는 남지의 할아버지인 남재에서 명문가로 도약을 하게 된다.
남지의 묘소로 가는 길은 조금 걸어서 안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무도 뒤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앞에도 아무 사람이 없어서 조용한 곳이다. 마치 숲의 터널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다가 갑자기 열린 공간이 나온다면 그곳이 바로 남지의 묘소다.
양지바른 곳에 묘소를 잘 쓰는 것이 의령 남 씨의 전통인 모양이다. 남지의 할아버지 남재의 묘소는 태조 이성계가 묏자리로 칭찬을 할 정도로 좋은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남재의 형제 남은의 운명은 그러하지 못했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두 형제가 공을 세웠지만 남은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방석 편에 섰다가 이방원에게 주살당하게 된다. 그 좋은 자리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걱정하자 이성계는 역적이 나온다 하더라도 3대가 아닌 그 대에서만 끝을 내어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한 남지의 묘는 조선 초기의 봉분으로 밑면이 사각으로 최근에 사초를 다시 한 것으로 보인다. 자리는 유혈로 맺혀 있고, 혈심이 봉분의 중심이 아니라 조금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성계의 약속은 후대에 역적으로 몰려 처참하게 죽은 남이장군대에서 지켜졌다는 설이 있다. 당시 남이장군을 죽게 만든 세치의 혀는 바로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었다.
묘소를 보았으니 아래로 걸어 내려가서 신도비를 볼 시간이다. 신발 속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무척이나 불편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신도비를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할아버지대에서 시작된 조선 명문가의 집안에서 자라난 남지는 음보로 감찰이 되어 부정·지평을 거쳐 의성군(宜城君)에 책봉되었다. 그 가문의 위세답게 딸은 왕족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아들 이우직(李友直)과 혼인을 맺는다. 그렇지만 그 일은 좋게 끝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안평대군은 시를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며 풍류를 좋아했지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려는 수양대군에게는 제거해야 될 대상이었다. 남지는 세조가 당대의 중신들을 모두 척결한 계유정난(1453년)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452년 풍질(風疾)로 사직을 하게 된다.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김종서 등을 모두 제거한 수양대군은 그들과 혼인한 가문도 척살했다. 그렇지만 풍질(중풍)로 말도 못 하던 남지는 병으로 인해 화를 면하고 천수를 누리게 된다.
남지는 죽은 뒤 1489년(성종 20) 손자 승지 남흔(南炘)의 상소로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주역에서 보면 시간의 원리는 음양의 위치가 바뀐 것이 계속 풀려나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풀려나갔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남지의 가계도를 보면 참 묘한 일들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났기에 필자는 알지만 그때는 그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억지로 풀지 않는 것이 시간의 흐름에 잘 적응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