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의병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구미라는 도시는 1970년 국가 수출정책을 바탕으로 내륙 최대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발전되어 산업도시라는 느낌이 강하다. 구미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곳의 이름이 선산도호부의 상구미면과 하구미면이었던 데서 유래하였는데 구미지역에도 오래된 흔적들이 적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유교문화재로는 서원이 많은데, 특히 금오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60호)·월암 서원·낙 봉서원이 유명하다.

MG0A9875_resize.JPG

일제강점기에 구미의 인물로 의병을 이끌던 왕산 허위 선생은 구미를 대표하는 항일운동가이기도 하다.

MG0A9879_resize.JPG

왕산 허위는 1855년 4월 2일(음력) 경북 선산군(善山郡) 구미면(龜尾面) 임은리(林隱里, 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허훈(許薰), 허신(許藎), 허겸(許蒹)에 이어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MG0A9880_resize.JPG

왕산 허위 기념관 바로 옆에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MG0A9888_resize.JPG

왕산 허위는 1894년 맏형인 허훈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피하여 피난생활도 했지만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나서 이듬해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그는 조동석(趙東奭) ・ 이기찬(李起燦) ・ 강무형(姜懋馨) 등 상주와 선산지역의 유생들을 규합하여 창의 하였다.

MG0A9891_resize.JPG

왕산 허위 선생은 고윤보선 대통령 때 건국공로훈장을 받게 된다. 건국공로훈장은 전체 5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건국훈장 대통령장·건국훈장 독립장·건국훈장 애국장·건국훈장 애족장 등 5등급으로 되어 있다.

MG0A9896_resize.JPG

일제에 완전히 통합되기 전인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고 고종이 강제로 양위하게 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전국에서 모인 의병 1만여 명이 13도 창의군(연합의병부대)을 결성하고 허위 선생은 군사장으로 추대되어 서울로 진격하지만 일본군의 기습으로 패퇴한다.

MG0A9899_resize.JPG

그의 의병활동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지도로 표시를 해두었다. 보통 한 집안의 형제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지게 된다. 허위 선생의 형제인 큰형 허훈은 동생들의 의병활동 군자금으로 제공하고 허겸은 경기도에서 허위와 같이 활동하며 허학, 허중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MG0A9900_resize.JPG


MG0A9906_resize.JPG

왕산 허위의 기념물로 독립기념관에 어록비와 서울 망우리공원에 13도 창의군 기념탑, 증손녀 미라가 그린 초상화, 서울 진공작전 모형과 왕산로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MG0A9911_resize.JPG

허위가 주장했던 고종의 환궁을 있던 해에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조선의 분할론이 처음 거론되었다. 을미의병이 일어날 때 이 부근 산청에서는 곽종석 등 200여 명의 유생들이 의병진을 편성한 후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 등이 기의하여 대구로 진격하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 했으며 전라도에서는 나주의 기우만 등이 광주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陳)을 편성하여 위세를 떨쳤다.

MG0A9914_resize.JPG
MG0A9920_resize.JPG
MG0A9925_resize.JPG

일제가 강제로 통합하기 전에 눈을 감은 왕산 허위가 이끌었던 의병부대의 의병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의병 연합부대의 전법은 유격 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왕산 허위 기념관에서는 그의 항일정신과 함께 일제강점기 직전의 한반도의 국제정세도 살펴볼 수 있다.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만병이 되어 따르노라

꽃을 꺽으니 손에 봄이요

물을 길으니 달빛이 집 안에 드네

- 허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관광산업 (觀光産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