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 토기 공방
옛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유물이다. 보통 유물은 고분군이나 가마터 등에서 가장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통 집터로 사용되던 곳은 후대의 사람들이 계속 살기 때문에 훼손이나 없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분군이나 가마터는 보통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대가야 토기는 고령을 중심으로 영남과 호남 동부지역 등 넓은 범위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발전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은 다양한 전시전을 매년 열고 있으며 2층에 가면 상설전시실에서 고령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대가야 양식의 토기는 고령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김해 기반의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나서 후대에 6가야를 이끌던 대가야는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남원, 장수, 임실, 여수, 순천, 광양 등까지 세력권을 유지하였다.
기획전시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대가야의 토기의 특징은 백제나 신라와는 달리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토기의 분포 범위를 통하며 가야와 삼국의 영역 범위나 문화 권역, 대외교류 등 다양한 세력권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대가야의 토기는 가야인들의 특징처럼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이라고 한다. 원통 모양 그릇받침은 조형미가 뛰어난 독창적인 형태로 대가야를 상징하는 토기라고 한다.
대가야의 긴 목항아리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들어 몸체 부분과 S자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대가야 토기의 굽다리 접시는 접시 부분이 납작하고 팔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는 사각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령을 중심으로 세력권을 유지하던 대가야 토기는 국력이 강해지면서 영역이 넓어지는 것과 함께 퍼져나간다. 6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야 남부권으로 세력이 확대되는데 이때 함안, 창원, 마산, 고성 등으로 유통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산되는 다양한 공산품처럼 당시 토기는 기술력이 집약된 고품질의 상품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업적인 토기 생산 체계가 확립되었던 대가야에서 대량 생산을 위해 공방과 가마시설이 집단화를 이루었으며 토기를 운송할 수 있는 도로망과 생산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유통망을 통해 창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직접 만들어서 퍼져나가던 형태에서 복합 유형의 형태로 바뀌었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이 되면 기술 제공과 모방을 통한 현지 생산을 하였는데 이때 창원 중동 유적 같은 곳에서 토기가 생산이 된 것이다.
고령에도 적지 않은 토기가마유적이 있는데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마을 뒤편의 송림리 토기가마유적이 있는데 그곳의 토기가마는 해발 100미터 정도의 비교적 경사가 가파른 곳에 만들어졌다. 바닥시설은 무계단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가야 토기는 모두 이름이 붙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와 목의 길이, 뚜껑, 손잡이, 굽다리가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붙여졌다고 한다. 목이 길면 긴 목항아리, 뚜껑이 있으면 뚜껑 있는 긴 목항아리, 목이 짧으면 짧은 목항아리처럼 붙여진다. 굽다리와 뚜껑이 있으면 뚜껑 있는 굽 자리 접시, 항아리에 굽다리와 손잡이가 있으면 굽다리 손잡이 항아리 등으로 불리게 된다.
고령과 창원의 가마터에서 발굴된 토기를 보면 그릇받침과 긴 목항아리를 보면 거의 똑같을 정도로 유사해 보인다. 자 그럼 창원으로 들어가 보자. 창원에는 중동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는 창원 중동 토기가마에서 대가야 토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창원 중동 유적은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중동에 위치하며, 2008~2010년에 발굴 조사하였다고 한다. 대가야시대의 생산유적인 토기가마, 고분유적인 구덩식 돌넛널무덤, 생활유적인 도로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창원의 토기가마는 길이 방향이 등고선과 수직으로 만들어졌으며 평면형태는 길쭉한 사각형이며, 1호 가마는 길이 6.5m, 2호 가마는 길이 7.7m이고, 최대 너비는 2.2m 정도이다. 가마의 몸체는 지상으로 드러내는 반지하식의 구조다. 고령에서 볼 수 있는 바닥시설처럼 무계단식이다.
창원 중동 유적에서는 대가야시대의 토기가마 2기와 폐기장, 구덩식 돌덧널무덤 36기, 도로 유구 2기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적의 조성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이었다. 중동 토기 가마는 고령의 대가야 장인이 직접 파견되었거나 토기제작기술을 제공해, 대가야 토기의 원거리 생산 체계와 유통 거점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동 토기가마는 '대가야 토기 공방 창원 분점'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창원에서도 출토된 대가야 토기를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봐야 한다. 멀리서 전체적인 크기와 형태, 높이와 폭, 비례감과 균형 감등을 살피면서 어떤 용도로 사용된 토기였는지 생각해 보는 것과 가까이서 무늬의 반복과 정밀함을 살피면서 표면의 광택과 뒤틀린 모양을 관찰하여 굽는 과정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밀하면서 핵심적인 기술을 창원지역의 세력가들에게 전달해준 것이다. 점토를 준비하고 모양 만들기, 세부 손질하기, 무늬 새기기, 말리기, 굽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과정은 지금은 간단해 보이지만 상당히 복잡한 기술이었을 것이다.
토기를 만들기 위한 장인의 도구들은 물레, 안질개, 점토, 꼬막, 물통, 물가죽, 두들개, 받침모루, 실끈, 정금대, 손칼, 대칼, 예새, 굽새, 눈금도구등이 필요하다.
지금도 기술의 이전은 상당히 민감한 이슈였다. 대가야가 있었던 시기에 핵심기술은 생활상에 반영되는 토기와 전쟁이나 농기구로 만들 수 있는 제련기술이 핵심이었을 것이다. 가야라는 국가는 기본을 보면 함께 공존하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토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저 멀리 창원까지 전파해주었고 창원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문화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대가야 토기 공방 고령 본점과 창원 분점
2019.04.09.(tue) ~ 06.16. (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