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사랑하면 인생이 가치 있어진다.
아마도 99%의 사람들은 죽음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나이가 들어 몸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서야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다. 죽음을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자신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게 된다.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던가 노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게끔 만드는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다. 사회가 인정하는 직업군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인가. 상위 1%의 삶을 누리던 대학교수 종신교수는 ‘리처드’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서 남은 인생의 단 1초마저 재미있게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삶을 살았지만 리처드는 가정에서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음은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살았다. 그는 모든 것이 잘못된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그 행동이 이상해서 수상한 교수처럼 보인다.
죽음까지 이르는 시간이라는 속도는 일정할까. 시간이라는 것은 잴 수는 없지만 그건 완벽하게 정량적이지 않다. 시간이 정확하게 정량적이었다면 광속의 속도로 갈지라도 시간이 같아야 할 것이다. 광속의 속도로 은하수 은하의 중심까지 가는데 21년이 걸리는데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주인의 21년이 무려 3만 년이라는 시간에 해당이 된다.
사람들(대부분은 나이가 먹은)은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언제인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음이라는 결승선이 시간에 따라 순차적(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으로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만 속도에 따라 시간이라는 개념이 달라지듯이 죽음을 인생 장기판에서 어디에 두냐에 따라 그 인생의 무게가 달라진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적용이 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시계를 쳐다보면서 숫자를 세고 있다고 치더라도 느끼는 개념은 제각각이다.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가치를 빛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죽음이다. 슬프고 허망하고 사람의 몸에서 생명을 가져가는 아픔이지만 그것이 있기에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