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성대 (太平聖代)

왕건의 의지가 담긴 논산 개태사

최근 일본과의 외교분쟁에서 보듯이 힘의 균형은 갖추어져 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국가 간에 정의란 의미가 없으며 힘에 기반한 탁월한 외교력만이 의미가 있다. 자신을 공격했을 때 상대방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면 무언가의 시도를 하는 것은 어렵다. 결국 접점을 찾게 되는 길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열세에 있던 태조 왕건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견훤의 후백제를 누르고 전란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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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 (太平聖代)를 원했던 왕건은 백제가 마지막 전쟁을 치른 황산벌이 있는 이곳 논산에 사찰을 건립하게 된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기 위해 919년에 송악(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친화와 견제정책을 같이 펼쳤는데 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에 현 논산시에 개태사를 창건하고 4년 뒤에 개태사를 완공하였다. 태조의 뜻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왕실 사찰의 역할을 하며 불교가 국교임을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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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여러 번 지나 본 적이 있는 길목에 개태사가 있는데 개타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작은 돌다리인 개운교가 자리하고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개태사는 936년에 창건한 뒤 시간이 흘러 1362년 공민왕 때에는 개태사의 태조진전에 가서 강화로 천도하는 일을 점을 치기도 했고 1376년에는 왜적이 개태사로 달려들자 박인계가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최영 장군이 이곳으로 내려와 홍산에서 왜구를 거의 섬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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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연못도 만들어져 있는데 많은 연꽃이 만개해 있지는 않지만 앙증맞은 연꽃도 구경해볼 수 있다. 나오면서 돌에 새겨져 있는 천운지라는 이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원래는 현재 건물이 있는 개태사와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개태사지가 따로 있는데 개태사 터는 6차례의 발굴 조사로 전체 가람의 범위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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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는 계절마다 한 번씩은 와본 적이 있는데 개태사지는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개태사 터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글자가 새겨진 기와, 수막새, 암막새, 수키와, 암키와 등의 기와가 발굴되었고 수막새와 암막새애는 화려한 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연꽃무늬나 도깨비 얼굴무늬, 여러 종류의 식물무늬, 귀목 무늬, 도깨비 얼굴 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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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실의 사찰이었던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하나 된 고려를 이룩하고자 했던 태조 왕건의 태평성대의 이상이 담겼던 사찰로 개태사지 석조여래 삼존 입상과 개태사 쇠북은 고려 태조를 상징하듯이 당당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자태를 갖춘 불상과 국내 최대의 쇠북으로 가치가 무척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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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을 해본다. 역사 속에서 잠시의 태평성대는 있었지만 영원한 적은 없었다. 한 번 흥하면 다시 쇠하는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민국과 북한의 북측 경계선에 GP 등을 파괴하던가 폭파하면서 공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힘의 균형이 결국 공존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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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는 독특하게 황금색의 불상이 아니라 3명의 돌로 된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개태사 석조 삼존불 입상이 세워져 있는 현재의 개태사 구역은 936년 태조의 명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여 940년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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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석조 삼존불 입상이 세워진 자리가 마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이 위치가 바로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한 장소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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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밥을 해서 먹어야 할 정도로 개태사에 있었던 스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녹슬었지만 얼마나 많이 밥을 해서 사람들이 같이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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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을 기념해 직접 작성한 「개태사화엄법회소」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의 신검이 마성(馬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왕건에게 와서 항복을 청하였다고 한다. 통일을 기념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기념비적인 공간이며 견훤은 자신을 배반하고 결국 후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아들 신검을 살려준 분을 못 이겨 등창을 앓다 생을 마감하였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500년의 고려를 이끌게 한 사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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