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계백장군 유적지
황산벌 전투를 이끌었던 백제의 장군으로는 잘 알려졌지만 계백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확실한 것은 황산벌 전투로 나가기 전의 직위가 달솔이라는 것이다. 달솔의 직을 가진 사람은 은꽃을 꽂은 관(冠)을 쓰고 자주색 관복을 입었으며, 도성의 5부(部)와 지방의 5방(方)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역할을 했다. 달솔이라는 직위가 주로 왕족들에게 주어졌던 점으로 볼 때 계백 역시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지만 계백 개인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많지가 않다.
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신라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고구려는 물론이고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유능한 통치력을 발휘했던 사람이다. 이곳에 잠들어 있을 계백장군은 백제의 마지막 혼이기도 했다. 백제군사박물관이 있기도 한 이곳은 계백장군을 모신 유적지로 유명한 곳이다.
만약 당시의 국운이 그 정도로 기울정도였다면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전란의 시기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은 당나라와 신라와의 협공으로 극에 달했을 때 백성들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논산지역에는 백제부흥운동을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백제의 황산벌 전투를 이끌었던 계백의 사당이 앞에 있다. 방문한 날도 어떤 나이 드신 분들이 이 사당에서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나당 연합군이 이미 탄현과 백강으로 진입했다는 급보가 전해졌을 때, 의자왕은 급히 달솔 계백에게 5천 명의 군사를 내주었다. 달솔이 낮은 계급은 아니지만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했을 때 보냈을 정도의 직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저술한 여말선초의 유학자 권근(權近)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처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계백의 행동을 인륜을 배반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백제의 멸망 원인을 의자왕의 실정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부당함을 주장하기도 하고도 있다. 계백의 장렬한 최후가 있었기에 패망한 백제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묘사된 것도 사실이다. 위쪽으로 걸어서 올라가면 계백의 묘가 나온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이곳까지만 올라와도 등에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다.
황산벌, 달솔이라는 직위, 처자식을 죽이고 나아갔다는 사실과 4번의 전투 외에 계백의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5,000 결사대를 이끌고 나아갔을 때 논산지역은 피비린내가 진동하여 천지는 모두 핏빛으로 물들고 봉화 연기 가득하여 해와 달도 희미하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처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떠난 것은 백제의 패망을 예상해서였을까. 패망한 나라의 작은 산골에서 아내는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가기에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처자식의 고충을 미리 헤아렸을지도 모른다.
황산이 있는 벌에서 전투를 이끌었던 계백장군은 장렬히 전사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은 거칠 것 없이 사비성으로 진격했다. 이어서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이 합세했다. 의자왕은 할 수 없이 도성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신했다. 사비성에서는 의자왕의 둘째 아들이 항전했으나 소용없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얼마 후,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의자왕 역시 버티지 못하고 끝내 항복했다.
700년 가까이 역사를 이어 온 백제라는 나라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이후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의자왕은 그곳에서 죽었고, 백제의 유민들이 결성한 부흥군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계백 장군 유적 전승지 일원에서 매년 4월에 계백장군의 충의·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봉행하는 사당제를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국가를 이끌어갔던 의자왕의 실정을 탓하면서 몇 명 안 되는 충신을 치켜세워주는 것이 전쟁의 합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향은 전통적인 유교 제향 의식에 따라 거행하여 분향례,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망예례 순으로 행하고 있다.
삼국(三國) 때에 충신과 의사(義士)가 물론 많았지만, 사전(史傳)에 나타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마땅히 계백으로 으뜸을 삼아야 할 것이다. - 동사강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