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제일(事知第一)

계룡에 김국광을 모신 모원재

모든 사물에 정통하였다는 의미는 어느 한 분야에 치중되지 않고 모든 분야에 깊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모든 일을 다 알고 그 순위가 첫 번째로 꼽을만하다.라는 극찬을 받았던 인물을 모신 사당이 계룡시에 있는데 이름하여 모원재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 모원재는 보수 중으로 인조 원년(1623)에 지은 모원재는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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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에는 김장생이 있듯이 광산 김 씨의 후손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모원재는 조선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김국광(金國光)(1415∼1480) 선생의 재실(齋室)이다. 김국광은 자(字)가 관경(觀卿)인데, 광주인(光州人)으로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철산(金鐵山)의 아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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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재 뒤에는 잘 정비되고 풍수지리상으로 좋아 보이는 묘소들이 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관리로서의 재간과 능력)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던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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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좋다는 것은 높은 벼슬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재능과 식견이 높아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공명정대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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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수 중인 모원재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 모원재는 올해 11월까지 철거공사와 모원재 동재 보수 및 복원을 통해 다시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 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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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은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해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다. 이에 북도인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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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보수 차원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모두 바꿀 정도로 대공사가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공사기간만 1년이 넘게 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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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도 품격이 있다고 한다.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간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품격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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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광은 정유년(1477, 성종 8)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하였으며, 무술년(1478, 성종9)에 도로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같은 해 졸(卒-사망) 하니, 나이 66세였다. 시호(諡號)가 정정(丁靖)인데,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정(丁)이요,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정(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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