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의 신녕향교
고려말 불교의 승려들은 귀족화 되었고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갈취했으며 기득권을 더 공고하게 만들면서 일명 고려인들은 고려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배운 젊은 학자들이 고려를 바꾸려고 했으나 가진 것에 더 가지려고 하고 변화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당시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자, 맹자, 대학, 중용은 필수적으로 배워야 했었다. 그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한 과거제도였다. 영천 인물로 대표적인 사람으로 정몽주가 있다. 성리학으로 고려를 다시 재건하려고 했으며 왕권 국가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다.
어느 시대나 옮음이 있고 그름이 있다. 때론 선과 악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배움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정몽주는 고려에 희망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보았고 절친 정도전에게 맹자를 권하기도 했었다. 정도전은 맹자에서 다른 길을 보았다. 비록 군주라도 잘못되었다면 백성이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말에서 내리듯이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신녕향교로 나아가 본다. 신녕향교는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1592년에 회신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 중건하였고, 1686년(숙종 12)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7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명륜당, 동재(東齋)·서재(西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응수 장군 유물(보물 제668호)과 신녕향교(유형문화재 제168호), 화남리 3층 석탑(보물 제675호)·석불좌상(보물 제676호) 등이 있는 신령면은 경상북도 영천시 서부에 있는 면으로 양파·마늘 등이 특산물로 생산되는 곳이다.
평평한 대지위에 만들어져서 신녕향교는 그냥 한적한 느낌만 주는 곳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고 책을 읽다 보면 때론 인간의 영혼의 균열점을 보기도 한다. 인간은 항상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가슴의 말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배움을 청한다는 것은 때론 불균형을 감당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이 된다. 과거제도는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 내지는 실천윤리로 삼았던 나라에서 주로 유교 경전의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수많은 시험을 통해 자신의 직업을 선택한다. 신라의 석학이면서 경주 최 씨의 시조가 고려시대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골품 체제를 고수하려는 진골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그 진출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유교적 소양을 갖춘 육두품 출신 지식인들이 통일신라시대 이래 많이 배출되어 있었기에 광종 때 과거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향교는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배우고 쌓을 수 있는 지역의 교육기관이다. 고려 후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신흥 사대부들이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신흥 사대부들을 대거 기용하여 반원 개혁정치를 실시한 공민왕 때 학교제도와 함께 개혁되었지만 우왕의 즉위와 함께 구 귀족세력이 득세하고 신흥 사대부 중심의 개혁론자들이 밀려남에 따라 과거제도도 1368년 이전의 구 제도로 환원되었다.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많은 것을 보고 듣음으로써 비로소 균형의 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서원이 생기고 파벌이 생기기 전까지는 향교는 비교적 공평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던 교육기관이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신녕향교 대성전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102호로 1985년, 교육공간의 중심 건물이며 강의를 하던 팔작지붕의 조선시대 건축문화를 담고 있는 신녕향교 명륜당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168호로 1983년에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