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착량교와 약수암

오랜 흔적을 찾아가는 길

국내에 있는 산양면은 모두 가보았다. 한 곳은 문경에 있는 산양면이고 다른 한 곳은 통영의 산양면이다. '산양(山陽)'이라는 지명은 '산 남쪽의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는데 1995년 1월 1일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폐합하여 통합된 통영시로 출범했다. 이때 산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산양읍으로 변경되었다. 즉 지금은 산양면은 문경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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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산양면 사무소라고 표시된 곳으로 오면 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지 김삼주 씨 영모 비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에는 전출신김송삼주송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양쪽에는 독지김삼주씨영모비와 독지김공삼주시혜비가 세워져 있다. 왜 이런 비를 세워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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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 건너면의 미륵도는 산양면에 속하지만 서산의 간월도처럼 밀물이 되면 섬이 되고 썰물이 되면 육지가 되는 곳이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여러 번 나무다리를 놓았으나 자주 무너졌다. 당시 나무다리를 굴량교라고 불렀다. 이 고장에서 태어난 김삼주는 재산을 일구다가 지역 사회 공익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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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장승은 옛날의 난간에 사용되던 돌이었다고 한다. 김삼주가 세운 나무다리가 다시 무너지자 사재를 털어 1915년 7월에 돌다리를 준공한다. 아치 모양의 돌다리는 착량교라고 불렸다가 일제강점기 때 통영의 해저터널을 뚫으면서 헐렸으나 김삼주의 공덕을 기려 이곳에 비를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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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는 원래 산양면 사무소로 사용되던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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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 그 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미륵도는 밀물과 썰물 때 달라졌던 섬으로 유일한 통로는 바로 착량교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다리를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헐렸던 착량교는 1967년 충무교가 세워지면서 산양면의 한편에 송덕비를 모아 세우고 그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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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양쪽에 통영시와 미륵도가 있다. 이 가운데로 통영운하가 뚫리며 본격적인 해상운송이 시작되었다. 원래 미륵도는 거제에 속했던 곳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통영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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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산양면 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6호인 통영 약수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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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암이라는 사찰 아래에는 약새미라는 샘이 있다. 동리명을 따서 도천동 약천이라고하는데 이 약수는 효능이 좋아서 피부병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까지 해운대 약천 또는 속칭 약수암새미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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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물이 흘러나오는 형태의 약수터가 아니라 약수가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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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약수암은 작은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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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佛坐像)은 통영 약수암 무량수전 내 중앙 수미단의 향좌측에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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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정신을 담고 사람은 물을 떠나 살 수는 없다. 불상의 의미도 있지만 약수암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물 약새미에 있지 않을까. 통영 약수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자세, 얼굴, 인상, 옷 등의 표현이 간결하지만 17·18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한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의 흔적부터 영조, 일제강점기의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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