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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03. 2019

통영 착량교와 약수암

오랜 흔적을 찾아가는 길

국내에 있는 산양면은 모두 가보았다. 한 곳은 문경에 있는 산양면이고 다른 한 곳은 통영의 산양면이다.    '산양(山陽)'이라는 지명은 '산 남쪽의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는데 1995년 1월 1일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폐합하여 통합된 통영시로 출범했다. 이때 산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산양읍으로 변경되었다. 즉 지금은 산양면은 문경에만 있다. 

구 산양면 사무소라고 표시된 곳으로 오면 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지 김삼주 씨 영모 비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에는 전출신김송삼주송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양쪽에는 독지김삼주씨영모비와 독지김공삼주시혜비가 세워져 있다.  왜 이런 비를 세워주었을까. 

이 다리 건너면의 미륵도는 산양면에 속하지만 서산의 간월도처럼 밀물이 되면 섬이 되고 썰물이 되면 육지가 되는 곳이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여러 번 나무다리를 놓았으나 자주 무너졌다. 당시 나무다리를 굴량교라고 불렀다. 이 고장에서 태어난 김삼주는 재산을 일구다가 지역 사회 공익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이 돌장승은 옛날의 난간에 사용되던 돌이었다고 한다.  김삼주가 세운 나무다리가 다시 무너지자 사재를 털어 1915년 7월에 돌다리를 준공한다. 아치 모양의 돌다리는 착량교라고 불렸다가 일제강점기 때 통영의 해저터널을 뚫으면서 헐렸으나 김삼주의 공덕을 기려 이곳에 비를 세우게 된다.  

아래에는 원래 산양면 사무소로 사용되던 터만 남아 있다.  

계단을 내려가 그 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미륵도는 밀물과 썰물 때 달라졌던 섬으로 유일한 통로는 바로 착량교이기도 했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다리를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헐렸던 착량교는 1967년 충무교가 세워지면서 산양면의 한편에 송덕비를 모아 세우고 그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통영의 양쪽에 통영시와 미륵도가 있다. 이 가운데로 통영운하가 뚫리며 본격적인 해상운송이 시작되었다.  원래 미륵도는 거제에 속했던 곳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통영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른다.

구 산양면 사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6호인 통영 약수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다.  

약수암이라는 사찰 아래에는 약새미라는 샘이 있다. 동리명을 따서 도천동 약천이라고하는데 이 약수는 효능이 좋아서 피부병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까지 해운대 약천 또는 속칭 약수암새미라고 부르고 있다.  

특이한 것은 물이 흘러나오는 형태의 약수터가 아니라 약수가 채워져 있다. 

통영 약수암은 작은 사찰이다.  

목종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佛坐像)은 통영 약수암 무량수전 내 중앙 수미단의 향좌측에 봉안되어 있다  

물은 정신을 담고 사람은 물을 떠나 살 수는 없다. 불상의 의미도 있지만 약수암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물 약새미에 있지 않을까. 통영 약수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자세, 얼굴, 인상, 옷 등의 표현이 간결하지만 17·18세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한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의 흔적부터 영조, 일제강점기의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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