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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0. 2019

힘의 논리

노성산성 백제를 방어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으려고 했었다. 외세에 의해 나라를 잃어본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는가라고 생각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백제, 고구려, 신라는 한민족이라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각각 국가로서 살아남기 위한 힘의 논리로 봐야 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방대한 땅을 당나라에 넘기고 삼국통일을 한 신라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 

오래간만에 논산의 노성산을 찾아가 보았다. 부여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의 마지막 방어선인 노성산성이 자리한 곳이며 그 아래로는 논산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화 산성이 있다. 그 앞으로는 황산벌이 펼쳐진다.  그 앞쪽으로는 대전 식장산의 고개의 옛 이름인 탄현이 있었다. 탄현이 뚫리면 황산벌과 바로 노성산성, 황화 산성으로 이어지며 그 너머에 바로 백제의 고도 부여까지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다.  

백제시대에 축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논산 노성산성(論山 魯城山城)은 웅진시대나 사비시대에 구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구축한 축성술은 근방의 산성 중에도 보기 드문 형태이며 성내에는 우물 4개소가 산성의 둘레는 약 900m이고, 높이는 서쪽이 4.2m, 남쪽이 6.8m이며, 폭은 6m의 규모이다.  

계백의 결사대가 황산벌로 집결하면서 당시 노성산성에 백제군이 주둔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곳의 봉화대가 남으로 은진의 노산(蘆山 : 지금의 황화산)과 이어지고, 북으로 공주의 효포산(曉浦山 : 지금의 月城山) 봉수와 이어진다. 

아래에서 적지 않은 땀을 흘리면서 올라오면 노성산성이 나온다.  이곳에는 암자 같은 사찰도 자리하고 있다. 의자왕의 아버지였던 무왕이 잠시 백제의 국운을 돌린 것 같았으나 백제와 신라의 균형추가 심각하게 신라로 기울어진 것은 관산성 전투라고 보아야 한다.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 있었던 삼국시대의 성인 관산성에서 태자 여창이 고전한다는 급보에 성왕은 군사 50여 명을 대동한 채 전장으로 향하다 사로잡혀 죽었으며 이 패전으로 백제는 좌평 4명과 3만에 가까운 장졸을 잃었다. 554년에 대패한 관산성 전투는 불과 100여 년이 지난 660년의 백제 멸망을 예고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노성산성은 백제시대에 만들어지고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군사적인 목적의 요충지로 활용이 되었다.  


국가 내에서 법이 존재하고 규율이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것들이 존재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그런 법은 힘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역사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변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노성은 역사적으로도 충청도의 큰 고을이었으며, 호남 지방에서 한양을 가려면 거쳐야 했던 삼남대로(三南大路)의 기착지 역할도 담당하였다. 이곳 노성산(348m)이 동쪽 상월면의 경계에 높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논산평야가 있어 계룡산에서 발원하는 금강 지류들이 노성천을 거쳐 논산천에서 합류하며 논산 곡창지대의 젖줄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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