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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29. 2019

탐관오리 (貪官汚吏)

순창 녹두장군 전봉준이 잡힌 곳

세상의 이치를 보면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하다고 해서 정의롭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머물러 있으면 아무리 좋은 마음이라고 해도 바뀌기 마련이다.  특히 사회가 시끄러울 때면 더욱더 많은 문제로 인해 곪아간다. 조선말 지역마다 탐관오리가 득세를 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동학운동은 살고 싶다는 백성들의 의지가 불씨가 되어 시작되었다. 몸이 작아서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던 녹두장군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면서 사회개혁에 큰 뜻을 품게 된다.  

동학 혁명가로 동학운동을 이끌던 전봉준은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정읍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가 되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곳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관이 만들어져 있다.  

고부군수인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았는데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부군은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의 발원지로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게 된다.  이것을 고부 민란이라고 부른다.  

조정은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한다고 하였으나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내려와서 가재는 게 편이라고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조직의 힘이 커지고 힘이 모두 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부패하게 된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게 된다.  그리고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며 당시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은 그냥 백성들의 민란이라고 치부되기도 했지만 조선말 세상을 바꾸려는 백성들의 의지가 결합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이 조직되고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된다.  

탐관오리에게 죄를 묻고 잘못된 행동을 한 양반들을 징벌해다라고 하고 노비문서를 태워달라는 등의 폐정개혁안을 요구했으나 당시 고종은 원병 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오게 만든다. 

세상을 살기 좋게 바꾸자고 일어섰던 전봉준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여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과 전봉준 휘하의 10만 여명의 남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으나 결국 일본의 정예군에 의해 학살당하다시피 하며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 싸움에서 대패하여 피신하게 된다.  

어릴 때 읽어보았던 노래 글귀가 순창군의 녹두장군 전봉준 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우금치 전투 등에서 패한 전봉준은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세상을 균형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지위가 높은 자리는 그만큼 책임이 뒤따른다. 현실적으로 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도 관리가 되려고 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고 한다.  전봉준은 동학운동의 정신이기도 하지만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라며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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