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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1. 2020

삶의 궤적

논산의 행림서원

소금쟁이가 물의 표면을 가로질러 갈 때 그 뒤로 원형의 다양한 소용돌이를 남긴다. 사람의 눈으로는 원형의 소용돌이만 보이지만 특수한 염료로 보면 흐름의 궤적이 나온다고 한다. 사람의 삶 역시 단순해 보이는 가운데 아름답고 우아한 궤적을 남기기도 한다.  아무 패턴도 보이지 않는 흐름에도 일종의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천천히 흐르도록 할 필요성이 있다. 1월 1일 하루가 상당히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논산의 행림서원이라는 곳은 육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육곡리를 품는 가야곡면은 백제시대에 덕근군의 행정치소가 있던 곳이며 고려시대 덕은 조선시대 가야실의 이름을 따서 가야곡면이라 부르고 은진군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육곡리라는 지명은 매봉 태봉 증토산에서 발기된 구릉에 의해 형성된 계곡이 6개로 큰골, 작은골, 서풍골, 요골, 지청골, 가마골이라고 하여 육곡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풍수지리설이 있다.  

전국에 있는 서원은 누군가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행림서원은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이었던 서익을 모신 곳이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서익은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에 많은 행적을 남겼다.  서원 앞에는 서원과 역사를 같이 한 압각수(鴨脚樹 :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서원 이름 ‘행림’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 때가 있고 느려질 때도 있다. 매끄러운 층류에서 물결 패턴이 성장하는 것을 일종의 흐름 불안정성( Flow instability)라고 부른다. 삶 역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불안정한 때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서익이라는 사람의 삶의 궤적을 보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라면 가시밭길이라도 갔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만년에 은진현에서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그루를 심고 만죽정을 지었다고 한다.

서익이 터를 잡은 은진현의 부근에는 금강 하류에 위치한 강경포(江景浦)는 내륙 수상 교통과 바다의 해상 교통을 연결하는 포구가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석성군·공주군·진잠군의 일부가 통합되어 논산군으로 이름이 바뀜으로써 은진군은 폐지가 된다.  

해야만 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현명하고 자신을 위해 삶을 사는 깨달은 사람인가. 서익은 부여서씨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내려온 핏줄이다.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부여서씨가 조선왕조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행림서원에 모셔진 서익부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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