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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9. 2020

사랑꾼의 사찰

백제 금산사의 겨울 

백제왕조중 왕의 업적보다 다른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 왕이라고 하면 무왕과 의자왕이 아닐까. 패망국의 군주이기에 의자왕은 후대에 왜곡되어 삼천궁녀라던가 방탕한 생활이 더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의자왕의 아버지였던 무왕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마를 캐던 소년이 이웃나라의 공주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슴속에 울림이 있다. 서동이 과연 무왕이 맞느냐에 대한 역사 속에서 실체적인 진실에 대한 논의가 있긴 하지만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부여와 익산 등에서 스토리텔링이 되고 있다.  


무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많은 활동을 보이고 백제의 부흥을 이끌긴 했으나 개인적으로 보면 어릴 때 행복했다고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강에서 밀려난 백제는 공주까지 밀려왔다.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지금의 진천 지방에 태수로 임명이 되어 일하던 시기 백제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일컫는 귀족들은 정치권력을 나누어 쥐고 나약한 임금들을 쥐고 흔들었고  무왕의 할아버지 혜왕과 아버지 법왕은 즉위한 뒤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사랑꾼이라고 알려진 무왕은 외부의 신라의 압박과 내부에서는 귀족의 알력 속에 600년에 즉위를 한다. 그리고 사찰을 세우며 민심을 추스르는데 익산의 유명한 사찰 미륵사를 비롯하여 이곳 김제의 금산사도 세우는데 금산사는 무왕 즉위 원년인 600년에 세운 곳이다.  부여의 사라진 사찰 왕흥사, 부여의 대표 관광지 궁남지는 모두 무왕이 만들게 한 것이다.  

금산사를 세우게 한 무왕의 의지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에서 서부의 남쪽에 밀려 있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무왕의 의지는 재위 41년 동안 지속이 되었다. 무왕의 의지에 의해 세워진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당간지주가 금산사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들어놓은 돌기둥이나 철기둥을 말하는데 대부분 돌로 만들어지며 철 당간지주는 한국에 딱 세 개만이 남아 있다. 

혜덕(慧德)이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금산사에는 보물 제22호인 김제 금산사 노주, 보물 제23호인 김제 금산사 석련데, 보물 제24호인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 탑비(慧德王師塔碑), 보물 제25호인 김제 금산사 오층 석탑, 보물 제26호인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보물 제27호인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등이 있을 정도로 김제의 대표적이 사찰이다. 

눈 오늘날 무왕이 미륵사와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살펴본다. 미륵보살을 모시는 미륵도량을 생각했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대사찰이었을 과거를 유추해볼 수 있는 금산사는 웅장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차분해 보이는 사찰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성취는 바로 스스로 깨닫고 즐거워한다는 독락이다.  사랑꾼으로 알려진 무왕 즉위 원년에 세워진 김제 금산사의 겨울은 춥지만 따뜻한 느낌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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