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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1. 2020

척화 (斥和)

정치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정치는 극단을 걷는 것이나 사람들을 선동해서 일방통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혼자라면 그래도 되지만 집단을 대표하고 공공의 예산을 쓰는 자리에 있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계속 균형점을 찾아가면서 살피고 깊게 사고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은 사람들은 중간에 가만히 있는데 자신이 계속 우측으로 간 후에 사람들 보고 좌측에 있다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린 대원군을 생각하면 척화가 생각난다. 권력에 대한 의지가 컸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묘까지 좋은 자리에 쓰고 조선 말기에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정치적인 대결을 했던 사람이다. 조선역사를 통틀어 대원군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4명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져 '살아 있는 대원군'이라고 불렸다.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졌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많지가 않다.  고종 19년(1882)에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었을 때 일본 공사가 요구하여 모두 철거된 것이다. 옥천군에 자리한 이 비석은 땅에 묻혔다가 이곳에 옮겨졌다.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라고 하는 12자로 큰 글씨로 쓰여 있다. 대원군이 서양과 교역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 묘의 도굴사건이 시발점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1,0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가야사를 불태우고 묘를 썼던 그에게 아버지 묘의 도굴은 분노할 일이었겠지만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치인이라면 사사로운 개개인의 감정을 내세우는 것이 합당했을까. 

모든 사람이 만족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가 아니라 대세의 흐름을 이어가면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던 흔적이 바로 척화비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근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막았던 그의 정치적인 행동으로 인해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되어 결국 일본의 강점을 막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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