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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3. 2020

백제가 지다.

백제의 마지막 왕실 사찰 왕흥사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48에 자리한 옛 사찰의 흔적만 남기고 있는 왕흥사지는  부여로 천도하여 사비시대를 열었던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창건한 백제 왕실 사찰이다. 그 후 백제의 왕은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왕흥사로 가서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왕실 사찰인 왕흥사는 577년에 세워졌지만 660년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왕흥사 잠성을 공격한 후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게 되었다.

익산의 미륵사지보다 왕흥사가 훨씬 규모가 큰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보는 것은 왕흥사지의 대지가 상당히 넓기도 하지만 위치상으로도 잘 다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왕흥사가 중요한 이유는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테라가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은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파받았는데 불상과 불경뿐만 아니라 왕흥사를 모델로 아스카테라를 창건했을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 “봄 2월에 왕흥사가 낙성됐다. 절은 강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화려했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했다.” - 삼국사기

왕흥사의 건립은 성왕의 죽음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백제군 3만여 명이 전사했는데 위덕왕은 아버지에 죄책감으로 인해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전쟁 일선에 나서게 된다. 전쟁에서 죽은 왕자들을 위해 왕흥사 목탑을 세웠으며  634년 무왕은 위덕왕에게 물려받은 왕흥사를 크게 확장해 완성하였다. 

백제의 낙화암에서 건너편에 자리한 이곳은 정말 대지가 평평하고 넓다. 무왕이 얼마나 공을 들여 대사찰로 완공하였을까. 이곳에서 백제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는 금동대향로가 나왔다고 한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함락될 때 제사 책임자가 금동 대향로를 묻으면서 후일을 기약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663년 사비성은 완전히 불에 타서 사라지고 왕흥사 역시 당시 소실되었으니라 보고 있다. 

부소산성에서 건너편으로 오면 왕흥사지가 나오는데 정말 고요한 느낌만 드는 곳이다. 사비시대에 백제왕이 사용하던 귀한 물건일 가능성이 큰 금동 대향로는 1993년 12월 22일 저녁, 길이 120, 폭 70, 깊이 60cm 정도의 웅덩이에 숨겨져 있었다.  향로가 출토된 곳은 왕의 묘역이며 제사터가 있었다면 금동대향로는 신물이라고 볼 수 있다.

2007년 출토된 가장 오래된(577년) 사리장엄인 왕흥사의 것은 “본래 사리가 2 매였는데, 묻을 때는 신기하게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전한다고 한다. 백제 왕실 사찰인 부여 왕흥사지 금당 앞 목탑 터 사리공(舍利孔·사리를 넣는 구멍)에서 2007년에 출토한 국내 최고(最古) 현존 사리 공예품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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