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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05. 2020

변화의 전쟁

칠곡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변화는 보통 일반적으로 평시에 시작이 되지만 군대의 전투 방식은 큰 전투를 치르고 나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은 격동의 시기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쪽도 혁명적인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면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장기간의 끔찍한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 북한이 전격적으로 남침을 해서 내려온 한국전쟁이 걸리게 된 방어선은 바로 칠곡군 지역이었다.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전투였던 왜관-다부동 전선의 총반격 작전이 벌어졌던 칠곡군으로 인해 반격의 기회를 얻었다. 북한과 남한으로 갈라진 한반도에서 남한의 군사혁명은 더디게 진행이 되었던 것이 전쟁 초반의 약세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칠곡군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성된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에는 462㎡ 규모의 기념관 1동은 야외 전시를 포함하여 야포 등 총 123종에 241점의 6·25 전쟁 때 사용된 무기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보통은 남자들 외에 그다지 관심이 없을 무기들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무기들은 전쟁 중에 혹은 전후에 사용되던 것이다. 

야외 전시장에서는 O-1G(SHOOTING STAR), 나이키 유도탄(NIKE MISSILE), M125장갑차 CARRIER, 76.2mm 곡사포 HOWITZER, 76.2mm 직사포 GUN, 40mm 대공포 ANTICRAFT GUN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는 전쟁에 참전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전쟁 이후에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지금도 생생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전역하고 바로 1주일 후에 일어난 사건이고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사건 등은 분단국가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분단국가는 여러모로 소모적인 일들과 많은 논쟁을 만들 수밖에 없다. 국방비 지출의 경제적인 부분부터 정치적인 논쟁과 국민의 분열 등까지 보이지 않는 것까지 합치면 규모를 산정하기가 힘들 정도다.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은 2001년 6월 25일에 6.25 참전 용사 충혼비를 세우고 2001년 12월 1일에 교육관을 준공하였다. 한 · 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을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북한군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 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 기록으로 남아 있다. 

미래에도 전쟁은 일어날 수가 있다. 군대에서 혁신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혁신은 게릴라전에서 전통적인 전면전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잠재적인 위협에 초점을 맞출 때 전쟁 억제력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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