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를 백제의 중심으로 끌어내다.
학창 시절에 역사를 공부할 때 백제의 역사는 삼국시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비중이 적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주는 그냥 백제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무령왕의 릉이 발굴되면서 백제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였다.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면서 다시 백제를 돌아보는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겨울에 공주역사 영상관에서는 무령왕릉을 발굴하면서 나온 흔적과 함께 그 역사와 과정을 기획 전시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공주의 무령왕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지금은 국립으로 운영이 되는 국립공주박물관의 시작은 바로 무령왕릉의 발굴 때문이었다. 그 출토유물 전시를 위해 건립된 국립공주박물관은 서울로 옮겨지려는 백제의 유물을 공주라는 도시에 남아있게 해 주었다.
무령왕은 백제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왕이기도 하다. 성은 부여, 이름은 사마 혹은 융으로 불리며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무령은 그의 시호다.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뒤에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백제를 안정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공주와 부여가 백제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서울은 이미 조선역사의 중심이었기에 백제보다는 조선에 비중을 두고 있다.
발굴은 늦게 되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동쪽 5리에 있다는 옛 능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백제의 왕릉이었다. 이 왕릉이 송산리 고분군을 가리킨다. 근대시기까지 누가 묻혀 있는지 모르다가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알게 된다.
대부분의 왕릉들이 도굴되어 누가 묻혀 있는지 몰랐지만 1971년에 발굴된 고분은 비로소 누가 묻혀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나오게 된다.
무령왕릉은 아치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 무덤방과 널길, 껴묻거리가 모두 고스란히 나왔는데 특히 무덤방에서는 왕과 왕비의 관과 부속품이 나와 지금도 국립공주박물관을 가면 만나볼 수 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백제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것은 서울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스란히 백제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곳은 공주와 부여라고 할 수 있다. 패망한 나라이기에 지워졌던 백제는 무령왕으로 인해 다시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