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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23. 2020

강한 고독

태종의 총애를 받았던 경녕군 부인의 묘

최근에 전염병으로 인해 경기가 안 좋다는 지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 하는 사회생활은 회사, 서비스 혹은 재화의 공급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고객 혹은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면 경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렇게 전염병 등으로 인해 활동이 위축이 되면 당연히 영향을 받게 된다. 서비스나 재화를 사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에 드는 생각은 사람과의 강한 결속보다 약한 결속을 가지기 위한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경기와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규칙을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나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경제생활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취미에 그친다면 한계가 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를 해왔다. 진정한 강한 고독이 가진 에너지와 능력에 집중을 했다. 어느 선까지 오르는데 시간이 걸리고 지루하지만 계속 걸어왔고 오늘도 걸었다. 배다른 형으로 세종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경녕군의 부인의 묘를 찾아서 안쪽으로 들어왔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오니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에 묘소가 나왔다. 경녕군은 태종의 후궁 아들이기도 하다. 본처의 아들의 뒤에 대군이라고 붙지만 후궁의 아들에게는 군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나이가 가장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왕비의 장자인 양녕대군보다 나이가 적다고 되어 있다. 경녕군은 양녕대군에게 아우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왕위 자리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않으며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대까지 여생을 모두 다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처세 덕분에 피바람이 불 때도 비켜나갈 수 있었다.  

이곳은 경녕군의 부인 청풍 김 씨의 묘소이다. 조선 태종대에 왕자 경녕군과 결혼하였고 안산군 부인으로 봉해졌다.  조선 세조에 삼한 부부인으로 고종 대에는 청원 부부임에 추봉 되었다고 한다.  

봉분이 되어 있는 곳 위로 열심히 걸어 올라와 본다. 묘소는 네모지게 호석을 두른 장방형이다. 묘소의 앞에는 문인석과 장명 등, 묘비가 남아 있다. 경녕군의 휘는 비이고, 자는 정숙, 시호는 제간이다. 

경녕군의 일화를 보면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후 적모(嫡母) 원경왕후의 상중에 기생 일점홍(一點紅)과 관계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후에도 일점홍을 집으로 불러들여 1423년(세종 5년) 대신들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세종은 형제의 정을 생각하여 그를 벌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은 처세와 자신의 브랜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녕군 부인 김 씨 묘소에서 보이는 음성의 풍경은 조용하고 고요해 보이기만 한다.  경녕군의 처세를 보면 과도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적당하게 능력을 발휘하고 배다른 형제들과의 균형을 맞추면서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혼자서도 능력이 좋은 사람은 같이 있을 때 훨씬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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