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Mar 02. 2020

인생의 최후

군산 최호장군 칠천량에서 전사하다.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나기 9년 전인 1536년 지금의 군산지역에서 태어난 최호는  무장인 아버지 최한정에게 훈련을 받았고, 1574년(선조 7년)에 무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무장의 길을 걸었다. 2년 뒤인  무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는데 이때  이순신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한다. 군산 최호장군의 유지에 자리한 사당은 영조 5년(1729)에 최호의 후손 최호선이 세웠으며, 최호의 아버지 최한정과 최호의 아들과 손자인 최몽란, 최효설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무장 생활을 하면서 1594년(선조 27)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기도 했던 최호는 이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재직 중이던 선조 29년(1596)에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이몽학은 조선왕족의 서얼 출신으로 야심이 있었던 사람으로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으로 불리는 반란을 일으켜 한때는 홍산·청양·대흥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기세를 올렸으나 최호 등에 의해 진압된다.  

최호장군의 유지는 탁 트인 곳에 만들어져 있다. 전면에 중의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 뜻 그대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충신의 이야기와 함께 묘소도 같이 자리하고 있다.  최호 장군은 지방 거주 사족 무반 가문 출신으로 병사(兵使)라는 무반 최고의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무예 때문이라고 한다.  류성룡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순신 장군은 선조 24년(1591) 2월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47세의 나이로 임명되었으나, 최호 장군은 선조 25년(1592) 9월에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57세의 나이로 임명되었다.  

마을에 여유 있게 만들어져 있기에 조용하게 돌아보기에 좋은 곳이다. 간간히 심어져 있는 소나무가 그의 절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의 휘하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의 군사를 이끌던 그에게 어둠의 기운이 드리우게 된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문초를 받은 끝에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으며 조선의 삼도수군은 원균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된다.  최호장군은 충청도에서 원균의 지휘 하에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기 위해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할 때 합류한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왜군은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공격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는데 이때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하게 된다.  

군산에 자리한 최호 장군 집안은 그의 고조부 최근(1413~1466)이 경기도에서 당시 전라도 임피현 발산리로 이주한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호의 가문은 임피현에서 세를 갖춘 가문으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여진족을 제압하고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 등을 제압한 최호는 1597년(선조 30) 7월 15일에 일어난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다.  약 보름 후인 8월 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명량대첩에서 왜군을 크게 대파한다.  최호장군인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다음 해인 1598년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 수 있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