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신기리 지석묘
한가해서 좋은 것인지 조용해서 마음이 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너무나 고요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북적거리는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원래부터 한적한 곳만 주로 찾아다녔다. 코로나 19가 없었을 때 서울의 지하철만 타봐도 그 밀집도에 빨리 낙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모든 것이 적당할 때가 좋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공간이 특히나 필요한 때이다. 세상에 혼자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책으로 먼저 읽어본 적이 있는 나는 전설이다에서 주인공은 2012년, 전 인류가 멸망한 가운데 과학자 로버트 네빌만이 살아남는데 지난 3년간 그는 매일같이 또 다른 생존자를 찾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방송을 송신하면서 시작한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을 사람들의 흔적인 지석묘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지만 지석묘는 흔하게 고인돌이라고 말하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기도 하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다. 돌 몇 개만 덩그러니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곳에 사람이 시대를 달리하여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논산 신기리는 전라북도 전주군 양량소면(陽良所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에 상사리(上沙里), 하사리(下沙里), 고암리(高岩里)를 병합하여 신기리라 하고 논산군 양촌면에 편입한 곳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의 신기리에 지석묘가 있다는 것은 선사시대에 이곳이 살만한 환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는 지상에 윗돌[上石]과 받침돌이 높이 올라와 있어 마치 탁자형(卓子形)으로 된 형상, 둘은 지면에서 낮게 4∼5개의 받침돌로 윗돌을 고여 마치 바둑판형으로 보이는 형상, 셋은 지면에 받침돌이 없이 큰 돌(윗돌)만을 지면에 바로 놓은 형상 등 3종류가 지석묘의 일반적인 형태다.
인간의 생활주거지가 주로 하천이나 낮은 구릉에 있었기 때문에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다. 지석묘의 지는 땅지가 아니라 가지지(시支)다.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은 형상으로 버티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 신기리 마을 대부분은 가촌(街村)·열 촌(列村)·괴촌(塊村) 등의 집촌(集村) 형태를 띠고 있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말, 새터, 신기라 부르고도 있다.
이곳 말고도 신기리 지석묘는 장선천(長仙川)의 하곡(河谷) 평지에 약 2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이 지역은 남방식 고인돌과 북방식 고인돌이 섞여 있는 지역으로 남한지역에서는 고창 상갑리와 더불어 중요한 분포지의 하나라고 한다.
모두 점판암(粘板巖)으로 만들어졌는데 출토유물로는 간돌검〔磨製石劍〕 1점, 돌살촉〔石鏃〕 15점이 수습되었으나 출토상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 19가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듯이 무덤으로 사용되었으며 상징적이었던 고인돌은 선사인들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