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pr 13. 2020

야은 길재

길재를 모신 금산 청풍서원

금산의 한적한 곳의 열린 공간에 자리한 청풍서원은 고려시대 야은 길재를 모신 곳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伯夷)·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는 내용의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를 읊으면서 사실 고려가 막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길재는  1391년(공양왕 3)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경사교수(經史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작업에 대한 새로운 해답, 새로운 관계,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논어 학이편 제2장에는 근본에 힘써야 하며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는 내용이 나온다. 근본을 세우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최소 10년이라는 긴 사이클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10년이 큰 사이클로 돌아가는 것이다.  

청풍서원에 모셔진 야은 길재는 11세에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후 배움이 남달라서 태학의 여러 학생들과 귀족의 일반 자제들까지도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여 이들을 가르쳤다. 이무렵 이방원(李芳遠:太宗)과 같은 마을에 살았으며, 성균관에서도 같이 공부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길재(吉再)의 청절(淸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청풍서원의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강당,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비각(碑閣),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등이 있다.

조선이 개국되고 나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1403년(태종 3)에는 지군사 이양(李楊)이 길재를 방문했다가 그의 농토가 메말라 생산이 별로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좋은 전답을 선사했으나, 사는 것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땅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학자.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삼은(三隱)이라 불렸던 야은 길재는 자신의 길을 걸었을 분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리만 빼놓고 모든 것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항상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다 보면 세상의 변화 역시 보이기 시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젓한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