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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6. 2020

이끄는 힘

독립운동의 두뇌(頭腦)였던 이상설

진천을 대표하는 막걸리를 만드는 곳은  덕산면(德山面)으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덕산막걸리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멀지 않은 곳인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현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1870년 12월 7일(음력)에 독립운동가였던 이상설이 태어났다. 이상설을 한국사에서 배울 때 가장 대표적인 행동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이다. 조선왕조에서 관리를 등용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은 1894년에 치러졌는데 이상설은  갑오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며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과거도 열면서 정상적으로 조선왕조를 이끌어나가려고 했으나 그 해는 매우 혼란한 해였다.  동학 접주인 전봉준이 이끈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하면서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다급해진 명성황후 정권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일본군이 텐진 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한번 들어온 일본군은 조선왕조를 압박하면서 계획대로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한 야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진천에서 태어난 이상설은 그 광경을 목도하며 조선왕조에서 다양한 벼슬길을 거친다. 진천군에 가면 이상설이 태어난 곳에 이상설 생가가 복원이 되어 있다. 그는 주요 관직에 머물며 을사오적과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날 따뜻한 날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지켜보았을 이상설 생각을 찾았다.  

그의 행적을 기리며 지금 이상설 생가에서는 그의 행보를 기리고 있다. 근대의 정치인이었으며 독립운동의 두뇌라고 불렸으며 한인사회의 거물급 인사였던 이범윤과 비교하여 안중근이 “이범윤과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급변하는 국내 정세의 불안과 외세 침투 등의 상황이 적극적 출사를 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1904년 일본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 안’을 제시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지금도 땅이 중요한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도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기에 일본에게 넘길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이상설은 진천에서 태어나 양부에게 입양되면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물려받은 많은 토지와, 서울 저동의 저택을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그 역시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되면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일어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을 맺게 된다.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해방되기 위한 독립운동은 탄압되었으며 1916년에 병석에 누었다가 1917년 향년 4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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