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pr 18. 2020

쌀뒤주

장화리의 사람 이야기. 

요즘에는 먹고사는 이야기가 더 중요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경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지만 지난 3개월의 시간은 멈춰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요하게 지나갔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뒤주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사도세자다. 비운의 왕세자였던 그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마감했다. 지금이야 쌀을 쟁여놓고 먹는 사람은 많지가 않지만 오래전에는 쌀을 저장하는 뒤주는 부의 상징이었다. 

김제의 벽골제를 보기 위해 여러 번 왔지만 가는 길목에 있는 장화쌀뒤주가 자리한 정종수 고택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쌀을 보관하는 장화쌀뒤주가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장화리 쌀뒤주는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 2길 150-5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보관되고 있는 쌀뒤주는 조선 고종(1863~1907) 때 만든 것으로 쌀을 가득 채우면 70가 마의 쌀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빈곤을 구제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각종 역이나 특정 공간에서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배급하는 일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대대로 정씨 집안은 만석군으로  불리던 큰 부호로 부자였기에 수백 명의 손님이 찾아와  머물렀을 때 식사를 제공했다고 한다. 쌀뒤주에 가득 채운 쌀이 한 달이 채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쌀을 보관하는 것은 대형이고 잡곡을 보관하는 것은 중형, 깨나 팥을 보관하는 것은 소형으로  구분이 된다. 지금이야 집에 쌀이 많다고 해서 부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집집마다 뒤주가 있었을 때 뒤주는 지금의 ‘쌀통’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부와 재력을 상징하는 물품이기도 했다. 뒤주가 있는 이 고택은 넉넉한 면적의 대지에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옛 속담에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는데 정면에 보이는 뒤주는 쌀뒤주인지 모른 채 보면 창고인지 화장실인지 모를 만큼 크기가 상당한 편이다. 시대가 변하면 부의 상징은 바뀌지만 그 인심을 베푸는 방식은 바뀌지 않는다. 어려울 때일수록 조금은 덜 가지고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각국에서 저소득층이 특히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베트남 곳곳에 무료로 쌀을 나눠주는 배급기가 등장했다고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자리를 잃고 생계난을 겪는 빈곤층을 도우려고, 민간 기업인이 일명 ‘쌀 인출기(ATM)’를 설치하고 개인 후원자들이 쌀을 기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역사에서 부농이나 부호들이 힘들 때 쌀을 풀어서 배고픔을 구하기도 했었다. 정종수 고택에 있는 장화리 쌀뒤주를 보니 요즘의 상황과 겹쳐진다. 

김제는 대한민국의 그 어떤 곳보다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기에 풍족한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그 풍족함이 수탈로 바뀌기도 했다. 옛날에는 뒤주였으며 오늘날에는 ATM의 형태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넉넉함의 상징은 베풂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절 (三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