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기에 지은 백산서원, 적산가옥
일제강점기에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지에 대해 역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 세세한 것까지 알기는 힘들다. 수탈을 위해 토지개혁부터 그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을 가져가기 위한 건물을 짓고 사무실로도 이용했다. 일본인들이 살던 주택이나 건물을 보통 적산가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한 서원들도 지어졌다.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서 3길 84 (백산면)에 가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8호(2000.06.23 지정)인 백산원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지은 목조 건물로서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청곡(靑谷) 윤찬을 비롯하여 구봉(九峰) 윤여임(尹汝任), 죽계(竹溪) 백선남(白善男), 죽음(竹陰) 윤자선(尹滋善), 담재(澹齋) 윤자민(尹滋民)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경내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정면 3칸의 백산사와 무인 및 무관들이 모여서 강의를 한 정면 5칸의 강당, 정면 각 3칸의 내·외삼문이 남아 있다.
윤여임은 윤찬의 아들로 백선남과 함께 병자호란 때 순국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윤자선은 윤찬의 후손으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윤자민은 윤자선의 동생이다.
남한상성에서 청나라와 주화하자는 최명길과 다수의 척화파의 의견이 격화될 때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윤여임은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인 광주까지 달려갔지만 적병이 이미 교통을 차단한 상태였다. 쌍령(雙嶺) 전투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야간을 이용한 적의 기습으로 백선남과 함께 전사하였다.
백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산서원이 세워지기 2년 전인 1926년에 농장을 운영하던 일본인의 농장 사무소로 건립되었다. 일본인의 자행한 토지 수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크림색 외벽과 붉은색 띠를 두른 듯한 오목한 모양의 지붕 등 서양식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복 후에는 약 10년간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이후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35년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