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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02. 2020

정치 (政治)

괴산 김시민의 충민사

온갖 정보가 쏟아지지만 지금보다 정보가 더 적었던 과거보다 현대의 사람들은 지식의 습득 양이 많을까. 자신의 생업을 유지하기 위한 지식 외에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사회의 분란을 야기하며 문제시되는 인포데믹의 정보들은 대부분 아무렇게나 만들어진다. 특히 유튜브 등을 통해 확산되는 정보는 자기 편향적인 사람들만 모아놓는 부정적인 효과를 확산시키고 있다. 세상은 넓고 모르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과거에 정치를 했던 사람들은 많은 학식을 쌓았다. 자신의 학식에 기반하여 주장을 펼쳤다. 그것이 때론 당론이 되기도 하고 서인, 남인, 북인, 소론, 노론 등으로 흐름이 갈라지기도 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나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작년 이맘때쯤 와보고 1년이 지나 같은 날에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 이곳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는 김시민 장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 (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사당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4일에는 박문수 어사의 진언에 따라 동래 부사 송상헌의 사당에서 김시민을 우선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1년에 한 번씩은 김시민 장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천안이나 진주 등을 가보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장군들은 대부분 문인이 그 역할을 맡았다. 물론 무인도 있었지만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문인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머리와 몸이 균형적으로 수련되는 것에 큰 비중을 두었다. 문무를 겸비했다는 말이 그런 의미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3년(1866)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 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 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치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람이 해야 바르게 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과 진리를 추구했던 조선시대 정치인들이며 관료들은 국가의 위기에 분연하게 일어섰다. 김시민 장군은 1591년 진주 판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군사를 편성하여 1차 진주성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다. 

사람에게 유달리 남다른 재능이 있다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이곳에 오면서 예전에 읽었던 마가릿 풀러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열다섯 살의 풀러는 자신을 가르친 선생님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탁월해지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스스로 자신을 쌓아 올렸다. 


"당신에게 지식이 있다면 남들도 그것으로 자신의 촛불을 밝힐 수 있도록 하라." - 마가릿 풀러

전에 왔을 때는 충민사에 김시민 장군의 영정이 있던 곳이 열려 있지 않아 만나보지 못했었다.   정면 3칸과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인 충민사와 김시민 장군 묘소,  묘역 전체의 오른쪽에는 구사당도 함께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시호는 충무다.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고, 그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 부원군에 추봉 되었다. 

김시민 장군의 영정을 보고 뒤로 돌아서 그의 묘소로 올라가 보았다. 정치인이었으면서도 임진왜란 당시 장군으로도 활약하며 진주성의 백성을 구해냈던 김시민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앞서 말했던 풀러는 무언가를 통해 스스로 존재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려고 했던 사람이다. 무신으로 활약하며 전사하기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된 김시민은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막아낸 후 성안을 순회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적군이 쏜 탄환을 왼쪽 이마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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