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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0. 2020

아라메길

구름재 운현궁을 본뜬 유상묵가옥

가야사를 불태우면서까지 명당에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썼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야심가였다.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지만 이하응은 이창응, 이정응, 이최응의 형제가 있었다. 그는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지금도 남아 있는 구름재의 이름을 딴 운현궁으로 거쳐를 옮기고 난 후인 1852년(철종 3년) 드디어 운현 집에서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태어났다. 명복이 바로 고종이다. 풍수지리의 동기 감응론에 따르면 묘의 좋고 나쁜 기운이 후손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기의 전달은 어릴수록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거쳐하였으며 고종이 자랐던 운현궁에는 정문과 후문 그리고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경근문(敬覲門)’과 ‘공근문(恭覲門)’이 있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궁이자 왕의 잠저였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지어졌기에 그 규모는 궁궐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한다. 

서산의 유상묵 가옥은 일제강점기에 바로 운현궁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서산 아라메길은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을 뜻하는 ‘메’를 합친 어여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경로에 유상묵가옥도 걸어볼 수 있다.  명당이라는 이곳에 유상묵은 서울의 운현궁을 본떠서 건축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운현궁보다는 작지만 배치나 구조가 유사한 곳이다. 

그 후손이 살고 있는 곳으로 전통적인 양반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배치가 되어 있는데 두 공간은 행랑채와 담장으로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후손의 이름이 걸려 있다. 유상묵의 본관은 서령으로 서령은 충청남도 서산의 옛 지명 이기도 하다. 1310년 서령부였던때 본관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서산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산지역에 본관을 두고 있는 서령유씨는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기에 해미읍성축제등에 적극적으로 참석을 한다고 한다. 서산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올해와 내년 해미읍성 축제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할 예정이다. 해미읍성은 태종대왕의 명으로 축조한 후 충청병마절도사 영을 두고 호남의 세곡과 물산을 운반하는 조운선보호와 왜구소탕의 본거지로써 호국전략 거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유상묵가옥은 대지 전면 담장과 사잇담은 막돌 담장으로 되어있고, 후면 담장은 토담 위에 서까래를 걸러 한식기와를 얹어놓았는데 출입문도 구별되어 각각 안대문과 사랑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ㄴ자형의 행랑채 익랑에 있는 중문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게 만들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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