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황산벌 전투의 전초기지
서기 660년 8월 20일은 백제의 운명을 가르는 날이었다. 부여에 도성이 있었던 사비시대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은 논산이었다. 백제의 주요 산성을 모두 지나치며 김유신이 전격전으로 부여로 들어오자 의자왕은 다급하게 계백장군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면서 논산에서 방어를 명했다. 노성산성이나 황산성같은 주요 방어성이 있었지만 김유신이 그냥 지나칠 것이기에 계백은 10배의 병력을 맞서기 위해 벌판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황산벌(黃山伐)은 오늘날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 및 신암리 일대에 위치해 있던 벌판이다.
둘레 830m. 해발 264m의 산봉에서 남향한 비탈을 긴 마름모꼴로 에워싼 사모형(紗帽形)의 옛 성인 황산성은 이번에 처음 올라가 보았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걸어서 올라가는데 땀이 저절로 났다. 황산성은 황성(黃城)·북산성(北山城)·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이라고도 옛 문헌에 기록이 되어 있다.
문터가 사방에 있는데 남문 쪽이 가장 낮으며, 문의 안쪽에 우물과 건물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황산성의 성벽은 내탁(內托 : 속을 단단히 다지고 겉을 쌓는 일)이 많으나 기본적으로 내외협축(內外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는 것)의 형식을 보여준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였으나 북서쪽으로 멀리 바라다보이는 노성산성(魯城山城)이 산봉으로 가로막혔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문터에서 300m쯤 북쪽 산봉우리에 작은 보루를 두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산성에 올라가면 관동리, 덕암리, 표정리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조용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황산성 안에서는 백제토기편이 많이 발견되고, 또 ‘大安元年(대안원년)’·‘黃山寅方(황산인방)’으로 판독되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이 곳이 백제 5방의 하나인 동방 득안성(得安城)에 관계된 곳임과, 고려시대까지도 계속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 조용하기만 하다. 가끔씩 산새들만 지저귀면서 자연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동쪽과 서남쪽으로 주변 가까이 산성들이 있고, 특히 동남쪽의 평야지대는 백제멸망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판이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이 바로 이곳이다.
경사도가 있는 곳도 있지만 걷기에 편하게 바닥에 길이 만들어져 있다. 둘레길 중간의 관동리는 황산벌 전투당시 나이 열여섯 살의 화랑 관창을 목 베인데서 연유한 지명이기도 하다. 황산성은 계백장군의 진이 자리했던 곳이라고 하다. 황산벌 전투당시 신라군에 맞서 분전한 끝에 산중고혼이 된 백제군들의 주검이 매장된 송정리 1구의 시장골 (屍葬骨)은 말그대로 시신이 매장된 곳이라는 의미다.
굳이 날이 좋은 날 세월의 흔적에 무너져 내린 황산성을 찾아 그 역사의 의미를 되살펴본다.
당시에 식수원으로 사용했던 이 샘터는 물이 연중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찾아갔더 날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황산의 우리말의 표현은 ‘눌메’라고 한다.
황산성을 둘러보고 다시 아래로 걸어서 내려간다. 황산벌 전투를 하기 위해 계백장군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부여에서 빠르게 이곳에 와서 진을 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차로 가면 논산에서 부여는 20여분이면 닿을 거리였으니 얼마나 급박한 가운데 이동을 했을까. 주변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황산벌전투 당시에 치열했던 그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