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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01. 2020

발굴 (發掘)

백제 역사속에 있었던 부여 금강사지

과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역사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은 그나라 국가의 문화수준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에는 당시에 지어진 사찰이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규모나 건축기술에서 백미라고 하는 정림사지와 왕흥사지, 금강사지등 대부분 패망하면서 불태워졌다. 

부여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기가 힘든 금강사지를 찾아가 보았다.  근대고고학이 발굴과 함께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왔는데 이제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바둑판식을 비롯해 사분법과 계단식 발굴 등이 일반적이다. 발굴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모든 유물과 유구를 그리고, 재고, 사진 찍고, 기록하여 뒷사람들이 쓸 수 있는 자료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금강사지는 주변에 약간의 흔적만 보여서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은 안내판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출토된 유물이나 가람배치로 보아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보고 있는 금강사는 절터에서 출토된 암키와 조각에 ‘金剛寺(금강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현재의 위치를 금강사지라고 부르게 된다. 

1964년과 1965년의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가람의 규모와 배치가 확인되었고 2019년까지도 발굴조사가 진행이 되었다. 가람의 배치는 동향하여 동서선상에 당전(堂殿)이 배치되고 있어 다른 백제시대의 사지들과는 이례적인 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금강사에서 장독대로 사용했다고 전하는 장독바위와 아래로 내려가보면 신터리봉이 있는데 신터리봉은 절을 지을 때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었는데, 그 흙이 쌓여 이루어진 봉우리라는 전설이 내려져온다. 

금강사지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보면 당시 사용했을 기와조각들도 보인다. 금강사지의 유물로는 백제 때의 연화문막새와 서까래끌개를 비롯하여 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의 암막새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남북 약 150m, 동서 약 170m의 네모난 구획을 이루었으며, 총면적은 약 7,800평(약 26,000㎡)에 달하는 금강사지는 2001년 9월 29일 사적 제435호로 지정되었다. 효과적인 발굴방법은 유적의 주요부분을 바둑판처럼 동서·남북 축을 중심으로 나누고 서로 엇갈려 발굴구덩을 벗겨내는 바둑판식 발굴방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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