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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9. 2021

금강사지

백제의 마지막 부흥을 꿈꾸던 공간

부여라는 지역은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지금은 한적한 곳이지만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했던 사비시대만 하더라도 화려한 계획도시로 만들어진 곳이다. 도성으로서 대규모 개발사업이 이루어진 시기는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를 추진하던 6세기 전반이다. 사비시대에는 성왕, 위덕왕, 법왕, 혜왕, 무왕, 의자왕이 재위하였는데 이때 왕굴 시설뿐만이 아니라 사찰도 많이 세워졌다. 백제 사비시대에 보고된 유적은 31개소인데 부여지역에만 25개가 위치하고 있다. 

금강사지같이 가람배치를 파악할 수 있는 사찰은 8개소이다. 부여 금강사지를 비롯하여 부여 군수리사지, 부여 능산리사지, 부여 왕흥사지, 부여 부소산사지, 부여 정림사지, 익산 제석사지, 익산 미륵사지다. 부여 금강사지는 부소산성에서 서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져 있다. 

금강사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여름에 화사한 꽃도 피어 있다. 금강사지를 칠악사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금강사라는 사찰 이름이 백제시대 문헌기록에서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사찰명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필자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마중 나오듯이 나와서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간다고 연락하지 않았는데 미리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기특한 녀석이다. 

금강사지 주변으로 보면 표고가 높고 사면의 경사가 급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이 흘러가고 있지만 금강사지는 그곳보다 높게 자리하고 있어서 지천의 범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금강사지를 알리는 비가 세워져 있지 않는다면 이곳에 사찰이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백제의 건축기술은 토양침식이나 배수체제를 고려하여 만든 것이 많이 보이는데 금강사지가 자리한 곳을 보면 자연발생적인 배수체계를 고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강사지는 지속적으로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백제에는 사찰이 정말 많이 만들어졌다. 부여 금강사지는 일제강점기에 금공리사지로 처음 보고된 사찰로 1960년대에 국립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금강사라고 명명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어 금강사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부여군이라는 지역은 청양군과 접하고 있고 공주시, 논산시와 익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여군은 하천과 금강이 만나는 지역에 넓은 충적 평야가 발달해 있다. 항공사진을 찍는다면 부여는 분지처럼 보일 듯하다. 

금강사의 가람의 배치는 동향하여 동서선상에 당전(堂殿)이 배치되고 있어 다른 백제시대의 사지들과는 이례적인 배치를 취하고 있다.금당지의 동쪽에 있는 목탑지 중심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는데, 가운데에 구멍이 있으며 금당 규모는 남북의 길이가 약 19.1m, 동서의 길이가 약 13.9m에 달한다.

부여에는 선사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나 그 역사적 중심은 백제시대로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서 6대 123년 간 백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필자는 금강사라는 이름을 보면서 금강불괴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무협지를 적지 않게 읽은 폐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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