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덕사의 면암 최익현과 고종
“신의 나이 74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 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조선땅이 아닌 이국땅에서 생을 마쳐야 했었다.
청양과 공주의 경계에 자리한 모덕사는 청양의 독립운동가 면암 최익현을 모신 곳이다. 그의 생가와 더불어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물품과 문서들이 남아 있다. 생의 마지막을 대마도에서 보내야 했던 그는 일본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다.
최익현은 이항로에게서 유학을 배웠으며 조선말 위정척사론과 개화론이 맞서는 때에 위정척사론의 대표격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그 강직한 성품덕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충청도 관찰사 유장환을 비판하였다가 사직한다.
그는 벼슬길에 물러나서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려고 하자 재정이 부족한 조선의 민생을 파탄시키는 일이라고 시폐사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파직당하기도 했다.
<시폐사조소 時弊四條疏>
1. 경복궁 중건 등 토목 역사를 중지하고
2. 세금을 걷는 정치를 그만두며
3. 당백전을 혁파하고
4. 사대문세를 금지한다.
대부분의 내용이 세금과 관련이 있다. 아마도 대원군이 세계 역사를 공부했더라면 프랑스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사대문세같은 것을 걷는데 조심했을 것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도 발견한 라부아지에는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징세청부인으로 일했는데 이로 인해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면암 최익현 역시 경주 최 씨로 그가 사용했던 도장들이 남겨져 있다. 지금은 디지털 인증이 일반화되어 공인인증서 사용조차 폐기되었으니 좀 더 수월하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될 듯하다.
임금이 몰래 내리는 명령이라는 밀지는 역사나 영화 등에서 등장하면 무언가 스토리가 있어 보인다. 고종은 1904년에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리는데 자신의 뜻을 받들어서 거사가 성공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알렸다.
최영년을 통해 전달된 밀지를 받은 다음 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본 후 최익현은 최후의 수단인 의병을 일으킬 것을 선택하는데 이때 올린 것이 바로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였다. 의병항일전을 택하긴 했으나 불과 일주일 만에 조선의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와 대치하다가 동포끼리 죽일 수 없다 하여 결전을 포기한다.
두 명 혹은 네 명이 맨 가마를 타는 것은 경제적으로 여력이 있는 양반들의 특권이었다. 가마의 범주에 드는 것은 연(輦)·덩·가교(駕轎)·사인교(四人轎)·보교(步轎) 등이 있다. 가마를 타고 대궐의 문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삼정승과 조선 말기의 청나라 공사에 한정되었다. 사인교는 판서 또는 그에 해당하는 관리, 초헌(軺軒)은 종 2품 이상, 사인 남녀(四人籃輿)는 종 2품의 참판 이상, 남녀는 3품의 승지와 각 조의 참의 이상이 탈 수 있었으며 그나마 평교자(平轎子)는 일품과 기로(耆老:60세 이상의 노인)가 탈 수 있었다.
최익현의 삶을 보면 유배 인생이었다. 당시의 실세였던 대원군에게 반대를 하다가 유배를 가기도 하고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던 운요호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다시 유배를 갔다.
최익현은 젊은 시절부터 장장 50여 년에 걸쳐 고종 임금과 상소문과 답서(答書)를 주고받았으며 이를 통해 누구보다도 고지식하게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켰지만 누군가 거사가 성공할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아래처럼 답한다.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 500년이 여기서 종지부를 찍으려 하는데 백성들 중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후손들 보기에 얼마나 부끄럽겠소? 내 나이가 일흔넷이지만 신하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 않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