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Jun 08. 2020

지주에 저항하다.

군산 옥구농민 항일항쟁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백성들은 수탈의 시기를 몸으로 버텨야 했었다. 경주 최부자집같이 소작농과 공존하는 삶을 꿈꾸면서 살았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한국인 지주와 일본인 지주의 수탈은 극에 달했었다. 군산과 김제는 비옥한 평야가 있었지만 그렇기에 일본인들의 쌀 수탈은 극에 달했던 곳이기도 하다. 전국의 평균 소작료가 40% 중반이었을 때에도 군산 옥구 서수면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이엽사가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한 것이 1927년이었다. 

지난주 망종이 지나고 나서 군산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논에 모내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농부라고 하면 지식인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던 시기에 옥구 농민학쟁은 조선인 소작농이 자발적으로 일본인 경찰에게 직접 맞섰으며 적극적으로 항쟁한 한민족 역사의 항일 독립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임피중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옥구농민 항일운동 기념비는 1994년에 건립된 것으로 매년 시민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 당시 옥구농민항일학쟁 관련자는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던 34명의 애국투사와 그중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18명이라고 한다. 

서수면의 농민조합 간부는 소작농을 대신해 이엽사 측에게 소작료 인상에 항의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본인 관리인(중간에서 관리하는 마름)이 요구사항을 거절하고 농민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오히려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해버렸다. 그러자 소작농 500여 명이 서수 주재소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하게 된다.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가 맑은 하늘 아래 세워져 있다. 서민들의 처절했던 삶의 현장과 일본의 수탈 현장과 만행은 군산의 여러 곳에 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아프지만 우리의 역사이기에 기억해야 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공감할 필요가 있다. 

뒤에는 당시 항일항쟁을 했던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6월은 호국의 역사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달로 순국선열이나 호국영령에게 조금 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를 보았다면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오면 임피중학교의 작은 정원이며 생태연못이 있으니 한 번쯤 돌아보아도 좋다. 오늘부터 학생들이 모두 등교를 시작해서 조심스럽게 수업이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옥구농민 항일항쟁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 군산 근대역사를 만나볼 수 있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아가 보면 된다. 옛 군산의 모습이 있는 박물관의 1층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할 만한 체험 공간이 주로 배치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덕분인지 몰라도 이곳은 대한민국 5대 우수 박물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입구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익숙한 메시지가 눈에 뜨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소작 조건은 차츰 악화되고 지주의 권리는 강화되었다. 즉 소작료율이 대체로 수확물의 5, 6할 수준까지 상승하였으며, 소작료에 토지개량비, 종자·농기구·비료·농약 등의 농업자재의 선대이자(先貸利子), 지세·수리조합비 등의 공조공과(公租公課)의 부담 등이 포함되어 옥구등의 이엽사 농장지역의 소작료율이 7, 8할에 이르러 빈번한 소작쟁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날 풍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