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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1. 2020

마음의 나침반

보령 갈매못 성지의 길은 어디에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신만의 나침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나침판은 쉽게 잊히고 세상에 휩쓸려 살면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주인공 잭 스패로우처럼 시각적으로 보이는 나침판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자신의 길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지만 이는 자신 스스로를 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생각이 인생의 선택을 결정한다.

전국에 피의 대가로 만들어진 성지는 핍박의 역사를 걸어갔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자신의 방향이 천주교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죽음조차 감사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대천해수욕장까지 가지 않아도 오천항에서 이어지는 해안길 도로는 멋진 풍광이 돋보이는 곳이 갈매못 성지길이다. 비가 온 것이 언제인지 모를 만큼 청명한 하늘 아래 성지의 시간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곳을 대원군이 처형장으로 택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한양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곳에 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무당의 예언과 명성황후의 국혼이 예정된 시기가 1866년이기 때문이다. 

정조 사후에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반대파 숙청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그전까지는 사화 등을 통해 반대파를 숙청해왔다면 1800년대에는 종교를 통해 핍박이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에서 왕조, 양반, 중인, 백성 등의 계급의 평등함을 추구한다는 천주교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지우며 세금도 동일하게 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에 일렀던 것이다. 

1845년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다블뤼 안주교는 1866년 합덕 거더리에서 화석두 루가와 함께 붙잡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매트르 오신부는 수원샘골에서  위앵 민신부는 합덕 세거리에서 주교가 잡힌 거더리로 찾아가 함께 체포되어 대원군에 의해 이곳 갈매못에서 사형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당시의 자료와 흔적들이 갈매못성지 기념관에 남겨져 있다. 그 밖의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로 물든(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 처형장이었기 때문에  보령분들도 오랜 시간 찾아오지 않았던 곳이다. 

갈매못성지에는 성당과 기념관과 뒤쪽으로는 야외에 예수가 걸어갔던 길이 재현되어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는 이곳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서 잠시 땀을 식혀볼 수 있다. 피의 역사를 견뎌냈기에 천주교가 이 땅에 자리 잡을 수가 있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은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행운을 생성하고 얻게 되는 인과 연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비슷한 인생 저금통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계속 꾸준하게 쌓지만 어떤 사람은 빼 쓰기만 한다.

바다가 보이는 갈매못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그 사람들의 목을 잘라서 매달아놓았다. 그런 사형을 효시형이라고 하는데  효시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각종 고문과 더불어 참형·능지처참 등과 함께 폐지되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폐지가 된 고문이나 사형 방법은 일제강점기에 다시 부활하였다. 있는 존재는 빈 것에서 비로소 설 수 있다. 모든 존재는 모두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고, 인연에 따라 분리되고 흩어진다. 외국인이었던 그들은 갈매못에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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