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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18. 2020

죽음의 흔적

서산 부장리 고분군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죽음에서도 차이가 난다. 지금 남아 있는 고분 혹은 왕릉, 묘 등은 당시의 세력가나 권력자였던 경우로 일반 백성들의 흔적은 집단 거주의 경우만 확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돈에 연연하는 것은 후손들의 삶이 보장되고 자신의 흔적이 길게 남겨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산시내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자리하고 있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환두 대도는 한성기 백제 지방 사회에서 확인되는 최고의 위세품으로, 피장자의 사회적 성격과 권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유물이라고 한다. 서산시민의 생활권 내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백제시대의 고분군으로 공주와 부여에 왕릉도 있지만 귀족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서산에서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 기지리 유적(機池里遺蹟), 언암리 유적(堰岩里遺蹟), 여미리 유적(余美里遺蹟), 예천동 유적(禮川洞遺蹟) 등이 백제의 흔적이 나오고 있다. 지금처럼 중앙정부가 지자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국가시스템으로 통합된 것이 아닌 삼국시대에는 지방의 세력과 중앙정부는 다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앙에서 가치가 있으며 위세를 증명하는 물건을 하사함으로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었다. 금동 관모나 장식 대도와 같은 위세품적 성격이 강한 유물은 중앙에서 하사된 것이기도 하다. 

불과 15년 전에 저 앞에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는 백제 금동관, 환두대도 등 1677점의 유물과 241기의 유구들이 나왔으며 2006년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75로 지정되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자신의 흔적이나 이름이 남겨지길 원하는 존재다. 모든 사람마다 인생의 책이 있을 수 있지만 흔적이 남겨진 경우는 일부분이다.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이런 유적들은 당대 세력가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던 사람의 흔적이다.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219-10번지 일대 1만 4108㎡에 있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 나온 수준 높고 다양한 유물들은 서산지역이 백제시대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5호 분구묘에서는 금동관모, 철제 초두, 금동이식, 곡옥, 각종 구슬류를 비롯한 환두대도, 반부철모, 철겸, 철부, 각종 토기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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