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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4. 2020

낙향 (落鄕)

우암 송시열의 8대손의 고택

대전 송촌동의 이름을 만들 정도로 은진 송 씨의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바로 고려가 망한 후 지금 회덕에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은진이라는 지역명은 논산에 남아 있는데 같은 한자로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시조 송대원(宋大源)이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지면서 은진송씨가 시작이 된다. 

괴산에 가면 우암 송시열의 8대손인 송병일의 고택이 남아 있다. 국가 민속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시기에 충청감사로 재직할 때 아버지를 위해 별당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규모가 있는 고택이었으나 지금은 안채, 사랑채, 사당, 곳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민가 공간 구성을 보여주는데 남자와 여자가 거주하는 공간을 구분하여 배치하였다. 

은진송씨의 시조인 송대원의 증손자인 송명의(宋明誼)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집단(司憲府執端)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낙향하여 처가인 회덕 황씨촌에 자리 잡으며 송씨들이 모여사는 송촌을 이루게 된다. 

덥긴 무척 더운 날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등 뒤로 흐를 정도로 이른 더위에 몸이 축축 늘어지는 가운데 고택을 돌아보았다. 은진송씨는 송유(宋愉)의 아들·손자인 7·8세에서 크게 3파로 나뉘고, 14세에서 40여 파로 갈라졌는데 그중 목사공파와 정랑공파가 대표적인 파로 목사공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동춘당공원의 송준길과 정랑공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암 송시열이 있다. 은진 송씨는 조선시대 문묘 종사 대현 2명, 종묘배향공신 1명을 배출했다. 특히 송준길은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내고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송병일의 활동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암 송시열의 8대손이니만큼 유학에 정통을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택에는 수많은 장독이 이 집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양반가에서 음식은 무척이나 중요했기에 장맛을 지켜나가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고택의 뒤쪽에서는 다양한 작물도 재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래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청천이라는 지역명을 사용한 고가라는 청천리 고가였는데 2016년에 괴산 송병일 고택으로 바뀌었다. 괴산이라는 지역은 우암 송시열에 사랑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화양구곡에 거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래서 그 후손들도 괴산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택의 안채와 곳간채는 홑처마이고, 안채 몸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좌우 날개는 맞배지붕이다. 곳간채는 삼량가이며 지붕은 맞배기와지붕이다. 사랑채는 몸채를 정면 6칸으로 하고 전후 툇간통으로 가구하였는데, 측면에서 보면 주간(柱間)이 넓은 두 칸으로 만들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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