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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26. 2020

위대한 전투

한국전쟁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한국전쟁 초기인 7월 미국은 전면전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군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와서 상황을 본 다음 미 사령부에 2개 사단을 보내주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남한 사람들은 미국이 파병한다는 소식에 큰 희망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북한군과 처음 전투를 치른 곳은 오산이었는데 장비의 열세로 북한군에게 속절없이 패배하고 이어 평택, 천안, 대전까지 후퇴하면서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하였다. 속절없이 밀려나가던 유엔군과 한국군, 미군은 낙동강을 기점으로 방어선을 형성한다. 

병참선이 길어지는 것과 동시에 미군의 개입으로 다급해진 김일성은 북한군 전력의 50%를 낙동강 전선에 쏟아붓는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는 명령과 함께 말이다. 조선시대 출장 관원을 위한 국영 숙박 시설인 원이 있었던 다부리의 다부원(多富院)은 사람은 많이 살지는 않지만 전략적 요충지다. 

다부동 전적지에는 당시 사용했던 무기들과 이후에 한국에게 인계된 군장비들이 자리하고 있다. 미 제25사단이 8월 1일 경남 마산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국군 1사단의 제11·12·15 연대 등 3개 연대로 북한군 3개 사단의 남하를 막아야 했다. 비교적 병력이 많지 않았던 통영 쪽을 통해 부산을 가려던 북한군은 한국 최초의 해병대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통영에서 막히게 된다. 이 작전을 통해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인 다부동의 전투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상당히 길게 늘어서 있어서 당시 병력으로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8월 11일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303 고지(작오산, 왜관 북쪽)∼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하였다. 

 다부동 일대의 주저항선[‘Y선’]으로 철수를 시작한 국군 제1사단은 이들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공략하려는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낙동강 방어 작전을 펼친다. 

다부동 전투는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으며 가장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 이래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방어하고 나아가 이를 격파했는데 이때 맥아더는 여러 번 반려가 된 인천 상륙작전을 다시 시도한다. 

한국 포병의 근간을 최초로 만든 포는 다부동 전투에서 사용된 75mm 곡사포다. 포병은 항상 궤적을 계산한다. 측량을 해본 사람이라면 포병의 궤적 계산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비행기 조종사도 그렇게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민간항공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거의 10년을 투자해야 하는데 그렇게 투자해서 지금 쉬고 있는 조종사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훈련기는 T-37C로 한국의 주력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트 기본훈련기였다. 

55일간이나 지속된 다부동 전투에서는 3개 사단의 북한군 2만 4천여 명과 1개 사단의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는데 당시 인천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병력을 빼지 못한 패착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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