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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3. 2020

세도(勢道)의 시대

흥선대원군, 최익현 그리고 조선 저물다.

필자는 정조 사후인 1801년부터 1900년까지를 세도의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부흥을 이끌었던 군주 영조와 정조 이후의 권력은 특정 혈연 성씨의 집안으로 넘어가게 된다. 원래 세도는 세상 가운데의 도리라는 의미의 세도(世道)였지만 바로 세도(勢道) 변질되어 버렸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대표적인 안동  씨의 김상헌의 후손  김조순이 있었다.  김조순에게 정조가 세자를 돌보달라 말했던 것이다. 가문의 특징인 척화의 정신만 유지한  권력을 온전히 노론에게 옮겨오려고 했었다. 그렇게 얻은 힘은 무려 반세기가 넘게 쥐어졌다.

세도의 시대 100년간 상당히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중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던 1833년에 태어나 마침내 고종의 등극으로 절대권력을 쥔 대원군에 대척점에 있었던 최익현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가려고 한다. 최익현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청양 모덕사에 가면 접해볼 수 있다. 그의 최후는 모셔져 있는 청양이 아닌 일본 대마도였다. 세도의 시대는 말 그대로 혼돈의 시대다. 안동 김 씨의 권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왕권을 압도할 정도로 컸는데 1820년에 태어난 대원군 역시 그들의 횡포를 보면서 커갔다.

대원군은 자신이 왕위에는 오를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들을 왕위에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속이면서 기다렸다. 김조순과 그의 아들 김유근은 순조와 헌종 대까지도 막강한 권력기반을 유지했다. 중간에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 씨 조만영 가문이 권세를 누리기도 했으나 고종의 즉위로 마침내 정치일선에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게 된다. 장마가 오기 전 맑은 날 최익현의 생가가 있는 모덕사를 찾았다. 한적한 곳은 생각하기가 좋다.

유입 키워드의 상위에 명성황후가 있기에 살펴보니 바람과 구름과 비라는 드라마 때문이었다. 드라마의 배경이 바로 세도의 시대였다. 드라마에서는 아쉽게도 최익현의 역할이 등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양한 유학자의 글을 쓰지만 제대로 된 유학자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김장생, 김집, 이황, 이이, 송준길 등 서원에 모셔진 분들은 균형적인 정치와 길을 제시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도의 시대에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세워진 서원들은 대원군이 생각했던 대로 지역에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유학자를 표방했지만 지역유지로 여론을 왜곡하고 착취했다.


면암 최익현은 대원군과 같은 시대에 세도정치를 보면서 컸으며 철종 대에 벼슬길에 올라 고종 때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그는 권력을 손에쥔 대원군의 무리한 행보에 대해 비판을 거슴치 않았다. 친정이 가능한 나이에 이른 고종을 두고도 정치를 하려던 대원군의 하야를 요구하고 결국 10년 만에 대원군은 물러나게 된다.

대원군은 자신이 힘을 가질 때까지 참았으나 국제정치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권력에서 정의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힘이다. 특히 국제정치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오로지 쇄국으로 조선과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잠시에 불과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1876년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로 무력화된다. 이때 최익현은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본과의 국제관계가 나빠지기 전에 대마도를 간 적이 있었다. 대마도는 최익현이 끌려가서 세상을 떠난 곳이다.  1862년에는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발발하였으나 세도정치의 사람들은 사회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고  삼정(三政)의 문란에 눈을 감았다. 이는 1863년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정치 운영형태 자체보다,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역량을 살펴보는 정치가가 없었던 것이다.

대마도에 가면 최익현을 모시는 수선사라는 사찰이 있다. 수선사는 백제에서 이주했던 법묘스님(비구니)가 창건한 사찰이다. 최익현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청양 모덕사에 모셔진 면암 최익현의 혼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면 대한인 최익현 선생에 대한 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익현은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려 큰 물길을 바꾸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때부터 경복궁 중건, 사대 문세, 당백전 발행 등 왕권강화에만 목적이 있었다. 심지어 고종의 비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권력구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가문으로 선택했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이 저물어가는 것을 보면서 극렬하게 저항했던 최익현은 붙잡힌 후 일본군 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가 한 줌의 조국 땅의 흙을 간직한 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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