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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4. 2020

나전칠기 (螺鈿漆器)

통영은 공예의 고장

지난달 세계에서 단 3점만 온전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나전칠기 1점이 일본에서 귀환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에 일본에서 들여온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나전합')을 지난달 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나전합은 고려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나전칠기 유물이라고 한다. 통영은 조선시대에 가장 재능 있다는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필수품을 만들었다. 이는 삼도수군 통제영이 통영과 한산도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해군을 총괄하는 해군사령부가 있지만 조선의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충청수영성, 전라수영성, 경상수영성으로 나뉘어서 관리되었다. 굳이 삼도수군이 하나의 지휘체제 아래 관리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고 파죽지세로 한반도가 유린당하기 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조헌과 영규대사가 청주성 등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육지 전투에서 연패하던 때에 해전에서 옥포해전, 사천해전, 당항포해전, 율포 해전, 한산도대첩 등으로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을 위한 자리가 만들어진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제를 새로 만들고 그 자리에 이순신을 임명하였다. 삼도수군 통제영이 이곳에 자리하면서 지명이 통제영에서 제를 제외하고 통영이 된다. 

통영에 기술이 집약된 것은 이순신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12 공방을 조성하였는데 전후에는 이곳에서 부채, 옻칠, 금은제품, 갓, 통영의 나전칠기 등이 만들게 된 것이다. 당시 한반도 공예의 기술이 이곳에 모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통영시청은 통영의 다양한 소식이나 나전칠기와 같은 공예품을 만나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오는 8월 7일에서 9일까지 제2회 섬의 날이 통영 도남 관광단지 등 관내에서 열리는데 무궁무진한 섬 이야기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에 오면 조금은 독특한 공예품인 나전칠기가 있다.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온화한 색감의 대모(玳瑁, 바다거북 등껍질),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나전칠기 특유의 격조 높은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으로 평가받는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의 아름다움은 통영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혼수 이불이나 방석, 결혼 필수품으로 사랑을 받았던 통영 누비도 좋지만 통영 나전칠기는 한국 나전칠기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나전칠기의 공예를 이끌어나가는 중심인물이 통영 출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나전 칠기는 아름다운 광채가 나는 자개 조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박아 붙이고 옻칠한 공예품이다.

통영시청의 안쪽에 오면 통영의 옛 고지도를 볼 수 있다. 통영의 나전칠기가 통영에  자리 잡게 되었던 때의 지도다. 우리나라의 나전은 고려 시대에 나전 기법이 눈부시게 발달하여, 도자기 공예와 더불어 고려의 대표적인 공예가 되었다. 진주 색깔의 광채가 나는 조개껍데기 조각이 자개이고, 자개를 박는 일을 나전이라 한다. 두꺼운 자개와 얇은 자개에 따라서 자르는 방법과 박고 붙이는 방법이 다른데 옻칠한 뒤에 자개 위의 칠은 벗겨 낸다.

나전을 풀이하면 소라 라(螺), 비녀 전(鈿)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통영의 바다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통영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함께 전해져내려 오는 공예의 절정인 나전칠기의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소수의 귀족 취향에 영합하여 정교하고 우아하던 특성이 점차 민중적 취향으로 바뀌어 신선한 감각을 새롭게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며 색상이 아름답고 껍데기에 굴곡이 적은 전복이 많이 생산되는 통영에 공업 전수소(工業傳修所)가 일찍부터 개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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