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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3. 2020

조(祖)와 종(宗)

유계만을 제사 지내는 칠산 서원

조선시대에 반정에 의해 폐위된 광해군과 연산군을 제외하고 모두 뒤에 '조'가 아니면 '종'이 붙는다. '조'는 태조 이성계처럼 국가를 세웠다던가 국난을 극복한 임금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임금에게만 붙여진다. 사도세자였던 아버지를 장조로 올린 것까지 포함한다면 27명의 왕중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장조, 정조, 순조까지 8명이다. 언듯 보기에 납득이 가는 왕이 있고 납득이 가지 않는 왕도 있다. 

부여의 정말 한적한 칠산리에 가면 칠산 서원이라는 서원이 1967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논산의 사계 김장생의 유학을 이은 시남 유계만을 제사 지내는 서원이다. 조선 숙종 13년(1686) 지방 유림의 유소에 의해 창건되어 1696년 사액을 받았다.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던 유계는 1646년 무안현감이 되고,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 부교리로서 왕의 장례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르도록 했다. 왕의 사후에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왕을 욕되게 했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유계가 보았을 때 묘호로 조가 합당하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을 듯하다. 칠산 서원에는 사당, 강당, 장판각, 내삼문이 있으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 마루이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조선시대에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 소신을 펴는 것은 유배당하던가 심각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물며 임금의 묘호를 정할 때 다른 대신의 의견들과 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계는 김장생에게 가르치을 받았으며 예하고가 사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그의 업적과 이력을 쓴 비도 보인다. 그는 사계 김장생에게 배우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었다. 굵직굵직한 역사의 순간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는데 효종이 죽은 뒤 일어난 예송에서, 서인의 입장에 서서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고 남인의 3년 설을 논박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2 고주(高柱) 5량 가구 구조이다. 

원정비(院庭碑)라 함은 서원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을 의미한다. 廟庭碑(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 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 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강학(講學) 기능을 상실하고 향사(享祀) 기능만 있는 경우에 쓴다고 한다. 

날이 참 덥다. 8월의 반은 계속 더울 것 같다. 처서가 지나면 조금 꺾일 것 같지만 그때까지는 쨍쨍한 태양 아래서 더운 여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칠산 서원의 한자를 보면 일곱 개의 산이라는 의미인데 칠산 서원의 사액이 내려지고 이 지역이 칠산리가 되었는지 칠산리여서 칠산 서원이 된 것인지는 좀 더 확인해봐야 할 듯하다. 


by. P.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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