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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9. 2020

개화(開化)

서재필이 생각했던 국가

주역이라는 책을 보면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 의미는 든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궁구(窮究), 경영하여 일신(日新)하고 또 일신해서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인 박제가 같은 사람으로 대표되는 실학사상이 있는데 이것이 조선 말기에 개화라는 것으로 바뀐다.  개화사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들리지만 당시 지배적 사상이었던 위정척사 사상과는 판이한 생각이었다. 

개화사상의 선각자들이 1869년 후반에 합류한 후 개화파를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김옥균이나 박영효, 유길준, 서재필 등이 합류하게 된다. 김옥균 등은 양반 출신은 물론, 중인·평민·군인·승려·상인 등 신분과 계급을 초월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서재필이 갑신정변 때 김옥균의 사상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 국가 실현과 함께 ‘귀족 타파’에 있었다고 회고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논산 연무읍에 가면 서재필 박사 본거지가 지금 남아 있다. 

초기 개화사상은 이러한 근대적 산업 경제 건설을 ‘회사’ 제도를 도입해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서재필은 갑신정변을 거사한 뒤 그는 정령관(正領官, 지금의 대령급) 겸 병조참판의 자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으로 몰려 생각하지 못했던 참담한 고난을 겪었으나 재주 있는 문사(文士), 의식 있는 청년, 모험심이 있는 정객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는 서재필 박사의 본거지다. 개화를 추진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해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인재를 능력에 따라 뽑아 쓰고 국민의 힘을 민족의 방위와 발전에 효과적으로 동원해,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수립하려는 사상이었지만 시기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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