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Aug 19. 2020

태종의 스승

부여 조신(趙愼)의 동곡서원

고려말 왕조의 몰락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있다. 종교가 정치와 결탁될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때 고려 후기의 학자이자 충절인 조선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사겸이었는데 신돈의 섭정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부여 임천에 숨어 지내면서 신(愼)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부여 임천면에는 많이 모여사는 성씨가 있다.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조선 말기 후안동김씨(안동김씨에는 같은 본관을 쓰는 선안동김씨와 후안동김씨가 있다)와 함께 대표적인 세도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풍양조씨는 고려말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회양공파조 조신(趙愼)은 회양(강원 내금강 일대) 부사를 지냈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의 잠저시(潛邸時)의 사부(師傅) 역할을 하며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임천에 자리한 동곡서원은 바로 그 조신을 모신 곳이다.  조선시대 철종 때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신(趙愼)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쪽 협문(夾門)으로 된 삼문(三門), 2칸의 전사청(典祀廳), 5칸의 고직사(庫直舍) 등이 남아 있다. 

부여에는 후손들을 가르치던 곳의 이름에 흥학당을 많이 사용한다. 말 그대로 배움이 흥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강당은 제향 때 제관들의 숙소 및 회합장소, 또는 유림들의 학문 토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마치 살림집 같은 느낌이 드는데 중부권의 고택이 아니라 남쪽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주택처럼 보인다. 동곡서원의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두는 곳이며, 고직사는 서원의 관리인이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명예도 크지만 출세의 길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봉상대부 회양부사를 지냈으며 당대의 학자인 이색·정몽주와도 가까이 지냈다. 그는 조선 태종의 어릴 적 스승이기도 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며 후대하였던 것이다. 

동곡서원의 뒤쪽으로 올라오면 제사를 지내는 곳이 나온다. 조신의 무덤은 부여에 있는데 무학대사가 묏자리를 잡아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는 풍양조씨 문중에서 회양공파가 가장 번성하였기에 전해진 일화라고 볼 수 있다.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 것은 조선 숙종 이후. 상신 7명·대제학 4명·공신 7명을 배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종이 13년 만에 후사가 없이 세상을 뜨자 조대비가 다시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대원군과 손을 잡고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후)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켰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풍양조씨는 조대비를 정점으로 하여 (후)안동김씨, 대원군, 명성황후 등과 잇단 결탁으로 세도정치를 이어왔지만,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을 거치며 몰락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장할 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