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Mar 20. 2021

주장할 권리

서인이었던 유계의칠산 서원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 권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제약한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수용할 필요는 있다. 지금도 수많은 주장들이 사회를 휩싸고 있다. 특히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특정계층에 혐오를 만들게도 한다. 얼마 전 회맹제(會盟祭)의 충성 서약문인 보물 제1513호인 이 유물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였다. 

이곳 칠산 서원에는 서인이었던 유계가 모셔진 곳이다. 물론 서인이 완전히 집권을 하였던 1680년 남인이 실각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부상해 공신이 되었을 때는 살아있지 않았다.  물론 이후에 서인은 1689년 숙종의 계비였던 희반장씨의 원자 책봉 문제로 남인이 재집권을 이루면서 공신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유계는 충청도에서 유림을 이어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논산의 돈암서원에 모셔진 사계 김장생에게 배웠으며 그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교류하였다. 유계는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여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주장할 권리는 있는데 치열한 학문적인 기반 아래 자신의 주장을 현실화하려고 했었다. 유계는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현재까지 문헌으로 존재가 확인된 회맹축은 1646년(인조 24년)과 1728년(영조 4년)에 제작된 것을 포함해 세 건이다.

당시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었으므로 그를 지지하는 파들을 서인이라 지칭하였다.  기호학파의 중심 학자인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유 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이 서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이와 김장생을 이은 유계는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칠산 서원의  서원 경내에는 제사 공간인 사당과 공부하는 공간으로 강당, 장판각 등이 있다. 사당 안에는 유계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세상은 아주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비슷한 생각과 읽었던 책들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임천 칠산 서원, 무안 송림 서원, 온성 충곡 서원 등에 제향 된 유계는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시강원설 서로서 예조판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화의가 이루어지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기도 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성사 (富城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