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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Sep 15. 2021

부성사 (富城祠)

실천 학문을지향했던 인물 최치원을모신 곳

지금처럼 정보에 접근하기 쉽고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수많은 정보 중에 사람들은 모든 정보를 지나치다가 자신이 듣고 보고 싶은 것에 머문다. 앞에 이야기는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본래의 진실과 알아야 될 것을 못 알고 사회가 혼란해진다. 신라 삼최이면서 어떤 향교를 가든지 간에 배향되어 있는 최치원의 살았던 시대가 그러했다. 

현재에서 존경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더라도 역사 속에서는 있다. 대신에 시간이 많이 들고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 만나볼 수가 없기에 그가 남긴 흔적이나 책 등을 곰곰이 살펴봐야 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더라도 어떤 의도로 썼는지 곱씹듯이 살펴봐야 한다.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에 가면 오래된 고목과 함께 옆에는 최치원을 모신 부성사가 있다. 신라 말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영정을 봉안한 이곳 사당의 명칭은 그가 태수를 지낸 곳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서산에 태수로 부임해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던 것일까. 교통도 좋지 않았던 그때 참 많은 곳에서 머물렀다. 부성 사의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본건물과 부속건물로 사당과 내삼문, 동재·서재 등이 있으며, 최치원의 친필로 새긴 ‘過仙閣(과선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최치원이 올렸다는 시무 10조에서 시무(時務)의 사전적 의미는 시급한 일,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일이다. 

아마도 신라 최치원은 오래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좋은 자연을 보고 세상의 고뇌를 벗어던지고 다녔으니 괜찮지 않았을까. 이곳 부성사의 건물은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어 다행이었다. 

최치원의 글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그가 쓴 글의 목록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당나라 문인들이 그의 글솜씨를 질투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참 최치원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전국의 향교와 서원 그리고 이곳 같은 부성사와 그가 걸었던 길을 되새김하며 걸었던 것을 보면 헛된 삶을 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성 여왕이 시무책을 받아들이면서 최치원은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오르기도 하지만 기존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중앙귀족들의 먹을거리를 위협하였기에 좌초되었다. 

53세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건 그의 마지막 글을 통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경주 최 씨의 시조 최치원은 불혹의 천재이며 세상의 문제를 관통하여 보았다. 그렇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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