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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Feb 27. 2022

명분과 실리

최석정과 박문수의 생각이 머문 송천 서원

최근에 국제관계나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명분과 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명분도 좋고 실리도 좋지만 최소한 그 이로움이 자신이나 정치적인 세력이 아닌 백성들을 향해 있을 때 정당함이 생긴다.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인이 있었는데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행동이 달랐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 오늘은 명분과 실리를 가지고 행동했던 두 사람을 거론하려고 한다. 한 명은 최명길의 손자인 최석정이고 다른 한 명은 박문수다. 

청주 청원구 오창읍 양지리에 자리한 송천 서원은 많은 유학자들이 모셔진 곳이다. 사우에는 김사렴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최유경·이정간·박광우·이지 충·조강·이대건·이제 신·이인혁·남구만·최석정·박문수·이종성·이효석·김여량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5칸의 사우(祠宇), 중앙의 모현문(慕賢門)과 양 옆의 협문으로 된 삼문(三門), 4칸의 모현재(慕賢齋), 5칸의 수호사(守護舍), 정문(旌門) 등이 남아 있다. 우선 우측에 자리한 경양사로 들어가 본다. 경양사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효정 이정간을 모신 곳인데 관찰사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80세 노인이 100세 노모를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춤을 참 좋아했던 모양이다. 인경문으로 들어오면 그 효를 기리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세종은 이정간의 효성을 알고 친필로 '가전충효 세수인경'이라는 여덟 자를 내렸는데 이는 뒤에 전의 이 씨의 가훈이 되었다고 한다. 

전의라는 곳은 세종이 약수를 마시면서 병을 고쳤다는 곳으로 유명한데 필자가 직접 마셔보고 지인에게도 가져다준 기억이 난다. 지인의 말로는 짭짤하면서도 약한 탄산수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송천서원은 1711년에 ‘송천(松泉)’이라고 사액되었는데 여러 인물 중 최석정의 행보가 눈에 뜨인다. 병자호란 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의 손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청에 식량 지원을 요청했던 사람이다. 당시 노론에서는 그때까지도 청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식량을 지원받는 것을 구걸이라고 했었다. 백성이 굶어 죽는 것보다 자신들의 명분이 중요했던 것이다. 

송천서원의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청주의 목령산이다. 많은 청주시민들이 찾는 곳으로 경사가 심하지 않고 등산코스라기보다는 산책코스와 같은 곳이다. 

최석정과 박문수는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무엇이 백성에게 이로울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며 행동했던 사람들이었다.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책들을 내놓는 것이 최석정이라면 박문수를 자신의 발로 돌아다니면서 관료들의 탐욕을 고발했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는데 광복 후 지방 유림이 복원계획을 공의하여 오던 중, 국고 보조를 받아 1975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곧은 말로 살았던 두 사람은 각자 숙종대의 관료로 영조대의 관료로 살았었다. 최석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숙종대에 여덟 차례 영의정을 지냈으며 박문수는 영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걸 사리사욕으로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학문이나 문장도 아니었다. 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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