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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9. 2020

고란수 (皐蘭水)

더운 날 젊어지기 위해 찾은 낙화암

낙화암에 대한 글을 찾다 보면 보수 쪽의 언론은 백제의 패망을 흥청망청하면서 재정을 바닥내고 여자를 좋아했던 의자왕의 이야기로 접근하는 것을 많이 본다. 백제가 호남의 역사이기에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신라의 고도였던 경주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만 백제의 고도였던 부여에 대해서는 상당히 저평가를 하는 느낌이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팩트가 아니다. 사비도성의 규모에서 삼천궁녀가 있었을만한 공간이 없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부여의 낙화암과 고란사를 찾아가 보았다. 한 모금에 3년씩 젊어진다는 고란수를 마시기 위해 간 것은 아니지만 목이 너무 말라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한 열 모금은 마신 듯하다. 가는 길은 가뿐하게 갔지만 오는 길은 흘러내리는 땀으로 인해 눈앞을 가리는 여정이었다. 

부여의 중심이 되는 사찰은 누가 뭐라 해도 정림사였다. 그렇지만 배후지역이었던 부소산성이 자리한 곳에도 작은 규모의 사찰이 있었다. 부소산성에는 서북사지가 있었는데 금당과 회랑, 목탑, 중문, 동피랑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찰이지만 백제의 거점에서 믿음을 위한 공간으로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폭염이 있을 때 야외에서 걷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다. 백제의 마지막 숨결이 느껴지는 곳으로 낙화암 때문에 처음 와보았는데 주변에 아름다운 숲이 자리하고 있어서 걸으면서 사색하기에 좋은 곳이다. 

부소산성의 성 안에는  계백장군, 성충, 흥수 등 백제 말기 충신들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삼충사, 왕들이 해맞이를 했다는 영일루,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반월루, 백제 말기 사찰 고란사, 백마강이 발아래 펼쳐지는 백화정이 있다. 좀 더 날이 시원해지면 더 둘러보는 것이 좋다. 

낙화암을 가려면 백화정을 지나쳐서 가야 한다.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내려다본다. 저 건너편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을 텐데 지금은 사찰의 터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660년 11월 5일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계탄(灘, 부여강)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였고, 7일에 이겨 700명을 목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절터는 폐허가 되었다. 

다시 200여 미터를 걸어 내려가면 왕을 위한 정자 또는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해지는 이곳은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있어 절 이름이 유래한 고란사가 나온다. 이곳을 내려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는데 올라올때 땀을 무척이나 많이 흘렸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백제의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했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무언가 영험해 보이기는 한다. 충남 부여군에 소재한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고란초라는 이름이 유래했는데 흔하게 볼 수 없는 식물이다. 약수를 마시고 갓난아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혹시 그 할아버지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사람과의 관계와 다른 성장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또 잃어버린 기회를 통해 삶의 무엇도 영원히 쥐고 있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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