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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3. 2020

부여 (夫餘)

부여 정암리 와요지

123년 동안 충청남도 부여에는 고대문화를 꽃피웠던 역사문화의 백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사비(泗沘:일명 소부리)라 불렀으며, 538년(성왕 16) 웅진(熊津:현재의 公州)으로부터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국이 멸망하였다. 사람들이 가끔 혼동하는데 백제의 뿌리가 되는 부여(夫餘)와 부여군의 부여(扶餘)는 한자가 다르다. 한반도에 자리한 고대국가 아니 지금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우리들 상당수의 뿌리는 북부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백제문화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은 정암리라는 곳으로 많지 않은 유적지인 와요지가 남아 있다. 도요지가 도자를 굽는 곳이었다며 와요지는 기와를 굽는 곳이었다. 무려 700여 연간이나 존속했던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를 세우고 아래로 내려와서는 백제, 삼한이었던 진한으로 내려가서는 후에 신라, 변한으로 내려가서는 가야로 자리 잡게 된다. 

장암리 와요지로 가는 길에는 부여의 백마강변의 연꽃을 만나볼 수 있다. 궁남지의 대규모 연지만큼은 아니지만 풍광이 괜찮은 곳이다. 

국가사적 제373호로 지정된 부여 장암리 와요지에는 백제기와 문화관이 자리하고 있다. 백제시대 가마 10기와 고려시대 가마 1기를 발굴한 곳으로 1987년 부여 대홍수 때 우연하게 발견된 가마 굴을 1988년 부여박물관에서 3차례 발굴조사에 의해 알려진 곳이다. 

백제가 일찍이 충청과 호남지역을 통일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일하게 부여인들이 아닌 독자적으로 마한은 적지 않은 기간 존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한은 지금의 나주시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주는 지금의 광역시 같은 12목에서 8목으로 행정구역이 바뀔 때에도 존속된 호남의 중심지였다. 

와요지의 역사를 이어가는 이곳에는 백제시대 기와 생산 유적인 사적 제373호 장암리 와요지에 위치한 부여 백제기와 문화관은 백제의 우수한 기와 제작 기술과 문화연구, 다양한 상품개발 사업과 및 체험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으로 올 일이 거의 없어서 와요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하게 부여를 지나치다가 만난 곳이다. 길에는 전통공예기술을 사용하여 기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두었다. 

가마터를 만들어 두었는데 양쪽에는 장작 등이 쌓여 있고 백제인들의 기술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만들어 둔 곳이다. 

안에는 만들어둔 기와들이 보인다. 보통 치미는 소성 및 운반이 용이하기 위해 하나의 치미를 제작 후 2 등분하는데 이 가마에서는 치미 소성뿐만 아니라  전돌이나 항아리, 큰 조형물 등도 소성 가능하여 앞으로 가마 활용도가 높다고 한다. 

주변에는 백제문화를 담은 정암리 와요지의 가마터가 이곳저곳에 있는데 이미 발굴을 끝내고 덮어놓은 터라 이곳이 와요지였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가마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파고 만들어둔 지하식 가마이며 연꽃무늬 수막새, 토기 등이 발굴되었으며 123년 동안 존속했던 사비시대의 백제가마 연구의 귀중한 유적이다. 

지역 공예가들이 백제기와에 대한 이해와 창의적 활용능력을 길러 현대 공예품 및 문화상품으로 개발하고 나아가 공예상품의 유통·마케팅을  하기 위해 매년  생생문화재 사업의 일환으로 ‘백제기와 활용 디자이너 양성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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