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목사로 서원을 세우다.
조선말에 군으로 통합되기 전의 행정구역은 고려 시대인 983년(성종 2년) 지방 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양주·해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황주 등 전국에 12목을 둔 것이 기반이 되었다. 이후 1018년(현종 9년) 때 공주·승주·양주·해주를 폐지하여 8목으로 줄였는데 충청북도에서 충주와 청주는 중요한 지역이었던 곳이다. 지금도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정치인들이 많지만 정구의 삶을 보면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정구는 1580년 창산지(昌山誌)를 편찬한 이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지역마다 거의 예외 없이 읍지를 편찬했는데 후대읍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방의 언론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읍지 편찬의 목적은 생민(生民)도 있었지만 풍속의 순화와 교육, 즉 교화에 주안점이 있었다고 한다. 음성 운곡서원에 오면 입구에서부터 오래된 고목이 있어서 정구의 삶과 무관치 않음을 엿볼 수 있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어떤 이가 죽어서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영혼은 온몸이 곪아 터져 더럽고 소름 끼치는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여자는 그 사람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영혼이 여자에게 물었다. "거기서 무얼 하는 건가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러자 여자는 "나는 당신의 행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오래도록 푸르게 생명이 넘치는 나무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정구는 정치적인 입지와 다르게 균형적인 삶을 살았다.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徐敬德)·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는데 13세 때는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주역을 계속 읽어보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할 수는 없더라도 현재가 맑아지는 것은 느낄 수 있다.
걷기에는 조금 불편하지만 겨울보다는 여름의 색이 더 좋은 것이 사실이다. 노자는 강해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은 아주 부드럽고 유연하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이고 가장 강한 것이다. 어디에 담기더라도 그 형태가 될 수 있는 것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기도 했던 정구는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했는데 사후에 이곳 외에도 성주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