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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7. 2020

저벅저벅 연풍

한옥과 성지의 조화가 있는 연풍성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구나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며 정답이 없으며 가장 풀기 힘든 숙제일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에 대해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철학의 모든 것은 이 3가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철학자 리히텐베르크는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엇을 했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은 한적한 분위기의 고장이지만 연풍은 교통의 요지로 김홍도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단원 김홍도는 179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12월 종 6품 해당하는 최고 직책인 연풍현감으로 발령받아 1795년 1월까지 재직했었다. 김홍도가 그려놓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걷다 보면 연풍성지의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연풍성지에는 십자가의 길, 다섯 성인상, 향청(옛 공소) 황석두 루카 성인묘, 형구틀, 중앙제대, 십자가(순교터), 순교헌양비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전에 왔을 때는 문이 열려 있지 않아서 향청을 보지 못했었다. 

조선 정조(正祖) 15년(1791) 신해교난(辛亥敎難) 이후 연풍 땅에 은거하여 신앙을 지켜가던 교인 추순옥(秋順玉), 이윤일(李尹一), 김병숙, 金말당, 金마루 등이 순조(純祖) 1년(180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처형당한 곳이다. 본격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해에 많은 희생이 있었던 연풍성지다. 

역시 탁 트인 개방감이 있는 곳이 좋다. 지역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자연과 만날 수 있게 만들어 놓는 것도 좋다. 

보령 갈매못성지는 여러 번 가보았지만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는 연풍성지로는 처음 들어와본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메트로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회장, 장주기 회장 등 다섯 성인과 성인들이 서울로 압송될 때 다시 서울에서 갈매못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이곳에서 쉬었던 것이다. 이곳 향청은 수령의 행정을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향리를 감찰하며, 민정을 대변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정면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앉아서 편하게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는 의자를 보면서 위기에 모든 사람이 이와 같다면 빨리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없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각처에서 체포되자 박해자들의 손쉬운 처형 방법으로 고안했어야 했다. 그 결과 형구돌을 만들어낸다.  직경은 1미터 둘레 4~5미터에 원추형 구멍을 뚫어서 처형할 사람을 앞에 두고 목에 줄을 두른 다음 뒤에서 사람들이 끌어당겨서 죽인 것이다. 연풍 순교성지에서 모두 4개의 형구돌이 발견됐는데 1964년 발굴된 첫 번째 형구돌은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기증되었고 현재 3개의 형구돌이 남아있다.

대형 십자가가 자리한 곳은 당시 사형장으로 옥터 또는 도살장이라고 부르는 곳이라고 한다. 

아까 말했던 형구틀이 연풍성지의 곳곳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達川) 연안의 수회창(水回倉)에서 이곳의 세곡을 모아 경강(京江)으로 보냈던 연풍은 소백산맥 북쪽 기슭의 이화천(伊火川)이 만드는 산간 분지에 자리 잡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군사ㆍ교통상 중요한 몫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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