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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27. 2020

이운 순례 에세이

발길 닿는 곳마다 평화가 깃들길

지금까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 국보 제32호의 팔만대장경은 보존을 위해 공개되지 않는다.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어쩌다가 한 번 공개가 된다. 바닷물에 나무를 담가 뒀다가 꺼내면 침향이 되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다. 팔만대장경 역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는데 나무는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산벚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다.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의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자료에도 있지만 예술성에 있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행,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명필인 한석봉이 사람이 쓴 글이 아니라 신이 썼다고 경탄했을 정도라고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기업이나 개인에게 재난지원금 등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는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의 역할이기도 했다. 몽골에 의해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고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고 했지만 경제활성화의 목적도 있었다.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 

대장경은 엄청난 국가재정이 투입된 국가사업이었기에 잘 보존하기 위해 이운(移運) 순례길이 시작되었다.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 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 고령의 개경포는 대표적인 순례길의 여정 속에 있다.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 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보고 있다. 제작과정은 상당히 오랜 기간 많은 인력이 투여가 된 고려시대 뉴딜사업이었다. 뉴딜사업이라고 하면 미국 경제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했던 사업을 생각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뉴딜사업은 적지 않았다. 국가예산이 투입된 것은 고려시대 뉴딜사업인 팔만대장경뿐만이 아니라 정조대에 화성을 건설하는 것도 경제를 활성화하였다. 

대장경판의 엄청난 양과 무게를 고려했을 때 바다와 낙동강 물길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보고 있다. 이곳 개경포에서 약 40㎞가량 떨어진 해인사까지 옮긴 경로도 기록은 없지만 추정컨대 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배로 서해, 남해를 돌아 낙동강을 거슬러 개경포에 도착했으며, 당시 영남 일대의 승려와 신도들이 경판을 이고 지고 열뫼재, 대가야읍, 낫질 신동재를 거쳐 해인사까지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령에는 옛날에  나루터가 참 많았다. 개경포를 비롯하여 구곡 나루, 진두 나루, 오 실 나루, 사문진나루, 노 강나루, 노곡 나루, 객기 나루, 답곡 나루, 도진 나루 등 무려 18개가 있었다고 한다. 

고령을 거쳐 만들어져 있는 순례의 길은 낫실 신리마을을 지나 미숭산과 문수봉 사이 낫질 신동재를 넘어 합천 야로면을 거쳐 해인사로 가는 코스이고, 성찰의 길은 고령 덕곡면을 지나 성주 수륜면과 가야산을 넘어 합천 해인사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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