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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30. 2020

정려 (旌閭)

대덕구의 고흥류씨와 이시직공정려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정려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정표하면서 지역마다 세워지기 시작했다.  삼강과 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사회적 신분의 고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세워졌는데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다. 대덕구에 대표적인 정려는 은진송씨가 자리잡게 한 고흥류씨에 대한 정려와 이시직공에 대한 정려다. 

대덕구의 정려나 옛날의 고택들은 대부분 송촌동이나 회덕 등에 남아 있다. 대전에 사람이 살던 마을이 있던 곳은 회덕지역과 서대전IC로 나가는 곳의 진잠지역이었다. 대덕구의 고흥류씨에 대한 정려와 이시직공에 대한 정려는 모두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하고 있다. 

마한의 54국 가운데 초리국(楚離國)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고흥 류씨(高興 柳氏)는 전라남도 고흥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잘 알려진 사람으로 유관순 열사가 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낮은 야산에 남향으로 세워진 류씨 부인(1371∼1452)의 정려각은  1996년 3월 27일 대전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효도·우애·절의 등의 선행을 한 자(孝子, 順孫, 節婦, 나라를 위하여 죽은 자의 子孫, 睦族, 救患과 같은 등속)는 해마다 연말[歲杪]에 본조(本曹)가 정기적으로 기록하여 왕에게 아뢰어 장권(賞職을 주거나 혹은 賞物을 주며 더욱 특이한 자는 旌門을 세워주고 復戶를 해 주고, 守信한 妻에게도 또한 복호를 해줌)한다.” - 경국대전


조선왕조의 정려 정책은 1392년(태조 1) 7월에 그 방침을 밝힌 이래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마을에 정려각이 세워지게 되면 혜택뿐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정려각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고흥류씨 정려각을 보고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시직공정려각을 보기 위해 걸음을 해보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겨울이었으며 막 코로나19 이슈가 등장할 때였는데 9월이 다된 지금도 코로나19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시직은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했던 사람으로 1635년 병조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장령·세자시강원필선 등과 장악원정·사복시정·봉상시정 등을 역임하며 조정의 주요 요직을 지내던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가서 하인에게 자기를 매장하도록 부탁한 후 목을 매어 자결했다. 

백일홍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이시직공은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나라에서 충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가문의 입향과 세거는 그 가문의 흥망과 함께 뒤바뀌게 된다.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집성촌의 흐름을 파악하고 각 세손마다에서 벌어지는 가문 잇기의 노력 또한 알 수 있다. 송촌동은 은진송씨의 가문이 퍼진 마을로 이곳에는 응당 그 가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시직공 역시 조부 이정현이 송준길의 증조부 송세영 사위가 되는 혼인 관계로 회덕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조상의 뿌리를 찾아 바로 알고 집안의 훌륭한 전통과 정신을 찾아 살피는 일은 조상 숭모와 애향심을 길러주는 한편 후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과거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바른 방향을 볼 수 있는 나침판의 역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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